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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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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하이: 청 왕조 몰락이 시작된 곳 _ 박승준

인천에서 서쪽으로 바다를 곧장 건너면 가닿는 중국 땅이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다. 웨이하이란 이름은 '위진해강(威震海疆)', 다시 말해 '중국의 위엄을 바다 끝에 떨친다'는 뜻이다. 그 대상이 한반도와 일본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웨이하이에 주둔해 있던 청(淸)의 최정예 북양(北洋)함대가 청일전쟁 말기인 1895년 2월 3일 일본해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됨으로써, 청에게는 위엄이 아니라 망신살이 뻗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둥반도 동쪽 끝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웨이하이 만(灣)의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섬 류궁다오(劉公島)가 있다. 면적이 3㎢에 불과한 이 류궁다오에 가면 갑오전쟁(甲午戰爭ㆍ청일전쟁) 기념관이 서있다. 웨이하이 항구의 부두에서 류궁다오로 건너가는 배표는 표 값이 무려 138위안(약 2만 5000원)이나 된다. 그 표로 배 삯도 하고 기념관 관람도 하며, 류궁다오에 조성해놓은 휴양림에 가서 힐링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기야 달랑 갑오전쟁 패배 기념관만 조성해놓았다면 굳이 그걸 보려고 그 비싼 배표를 사서 건너갈 중국인들은 없을 터이다. 휴양림으로 가는 길에 갑오전쟁 패배의 기억을 다시 되새길 수 있도록 설계된 기념관이다.

 

사진 1  류궁다오 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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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길로 5㎞ 떨어진 류궁다오 남쪽 해안의 부두에 도착하면 그 부두 바로 옆으로 갑오전쟁 기념관이 보인다. 배에서 내리면 부둣가에는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청 제국의 전함을 상징하는 시커먼 조형물이, 바닷물 속으로 곧 가라앉을 자세로 서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진열관'이라고 쓴,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쓴 특유의 동글동글한 글씨가 보인다. 입구 옆 안내판에는 이 지역이 원래는 군사금지구역으로 폐쇄되어 있다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직후인 1985년에 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돼 출입금지가 풀렸고, 2005년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결정으로 이곳에 갑오전쟁 패배 기념관 건립이 결정됐으며, 3년간 공사 끝에 베이징(北京) 올림픽이 열린 2008년에 개관했다고 적혀있다.

 

사진 2  갑오전쟁기념관 옆 침몰하는 청국 전함의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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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전쟁 패배 기념관 입구에는 "우리에게 천년의 큰 꿈을 되살려준 것은 바로 갑오전쟁(의 패배)에서 시작됐다(喚起吾國千年之大夢 實自甲午一役始也)"고 쓴 청말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의 글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2012년 말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 체제가 대내외에 선포한 '중국의 꿈(中國夢)'이 시진핑 당총서기가 처음 만들어낸 개념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글귀인 셈이다. 평소에도 '앞의 일을 잊지 않는 것이 뒷일을 처리하는 스승이 된다(前事不忘 後事之師)'고 즐겨 말하는 중국 지도자들의 말마따나, 갑오전쟁의 패배가 중국이 오래 잠들어 있던 긴 꿈에서 깨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청일전쟁은 1895년 봄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이 그 발단이 되었다. 그해 6월 3일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지원 병력 파병을 요청했고, 청군은 6월 8일 조선에 도착했다. 그러나 사태를 미리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이미 6월 2일에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결정에 따라 조선에 파병하여 청과 한판 전쟁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있던 터였다. 청일전쟁의 개전은 1894년 7월 25일 우리 서해의 아산만 입구에 있는 풍도(현 행정구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근해에서 일본해군의 청해군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개전 당시 일본 해군은 전함 32척에 어뢰정 24척을 보유한 실력이었고, 웨이하이를 모(母) 기지로 하고 있던 청 해군 북양함대는 전함 25척으로 열세였다.

 

사진 3  청 해군 북양함대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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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개전 6개월만인 1895년 2월 3일 일본 해군이 웨이하이의 류궁다오에 설치돼 있던 청 해군의 모 기지를 기습 공격하고 나섬으로써 대세가 결정되었다. 어뢰정에서 비대칭 전력의 우세를 보이던 일본해군은 우선 웨이하이 동쪽 해안에 육군을 상륙시켜 청군의 수륙 양면 공격을 차단시킨 뒤, 어뢰정을 웨이하이만에 들여보내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이 독일에서 수입한 전함들로 구성해놓았던 청군 함정 대부분을 격침시킴으로써 전투는 14일 만에 종결되었다. 1895년 2월 17일 오전, 가라앉지 않은 청 해군 함정에 일본해군이 일장기를 게양함으로써 일본해군의 기습작전은 청 해군의 근거지를 장악했고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청일전쟁 패배 기념관 진열관 안에는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패전조약 체결 문서에 서명하는 북양대신 리훙장과 이를 지켜보는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밀랍인형상도 당시의 회담 모습대로 진열되어 있다. 청이 결정적으로 일본 해군의 류궁다오 기습을 막지 못해 청일전쟁에 패배함으로써 타이완(臺灣)과 랴오둥(遼東)반도1)를 포함한 7개 지역을 일본에 식민지로 제공하게 되는 불평등 조약이 바로 이 시모노세키에서 체결된 조약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1조가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하며 이 조약 체결 이전 조선이 청에 대해 시행하던 전례(조공)는 시행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는 사실이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2000년 이상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조선반도를 강제로 떼어내어 식민지로 삼는 절차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류궁다오의 갑오전쟁 기념관은 중국의 일본에 대한 패배의 기억을 철두철미하게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청일전쟁 당시 청 해군과 일본 해군의 실력은 청군이 다소 모자라는 상황이었고, 일본 해군의 전함들이 최종적으로 류궁다오를 공격하기 위해 웨이하이만에 진입할 때 종대로 늘어선 1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상세히 기록해놓기도 했다. 갑오전쟁 패배의 아픈 기억을 담아놓은 기념관은 곳곳에 처절한 반성을 기록해놓았던 것이다.


올해 1월로 5차례나 감행된 북한 핵문제의 해결이 국제사회로부터 더욱 더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청와대 게이트로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으로 오바마의 아시아 중시 정책에 따라 진행 중이던 미ㆍ중 갈등에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트럼프 시대의 동북아시아는 더욱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바다안개 속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사소한 감정에 집착하기 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보다 큰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다.          

 

 

박승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1)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6일 후, 러시아프랑스독일의 간섭으로 일본이 라오둥반도를 포기하는 대신, 중국은 일본에게 백은 3000만량을 배상했다. 역사는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부른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중국학술원 산동성 조사팀에서 촬영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