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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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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북한화교의 사회단체 조직 _ 송우창

현재 북한화교 인구는 약 6천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화교는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소무역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 일반 북한 주민보다 소득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북중 국경도시인 단동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호부터 '북한화교와 한반도'라는 제목 하에 북한화교 전문가인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의 송우창(宋伍强) 교수의 연재로 북한화교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북한화교는 북한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어 북한의 실상을 전해주는 하나의 통로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한다.

 

해방 후 형성된 북한화교 관련 연구는 북한의 제도적 문제와 사료(史料)의 부족으로 인해 북한화교 사회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기조차 곤란한 상황이다. 필자는 최근 공개된 중국 외교부 당안과 그 외의 중국 지방정부 당안, 그리고 1960년대 이후 귀국한 북한화교에 대한 인터뷰를 기초로 북한화교의 역사를 정리해내고자 한다.

 

1945년 해방 직전, 북한지역에는 약 6만 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된 8월 15일부터 1947년까지 노동자를 중심으로 1만 8천명이 귀국함으로써 4만 명 정도가 북한에 남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해방 직후 북한지역의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소련군이 해방 직후 북한 영토 내 일본군에 대해 공격을 가하기 위해 나진, 청진, 원산을 거쳐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각종 단체들이 정부 기능을 대신하여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패전한 일본인이 우왕좌왕 하는 상황에서 화교는 자기 방어를 위해 사회단체를 조직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해방 이전 존재했던 각 지역의 중화상회 조직은 형식상 폐쇄되었지만, 각지의 화교 지도자들은 명칭을 화교회(華僑會)로 변경하여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소련군은 이러한 화교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북한 각지에 화교회가 설립되었다. 각지의 화교회는 각 지방의 북한임시정부와 연계를 가지며 활동했다. 한편으로는 1947년 2월 서울에 설치된 국민당정부의 중화민국 총영사관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의 세력권 내에 있었고 중국 대륙에서 국공내전이 격렬히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화민국 국민당정부는 북한화교를 보호할 수 없었다.

 

사진 1  中共東北局駐平壤辦事處 직원 기념사진

中共東北局駐平壤辦事處 직원 기념사진.JPG

 

1946년 8월, 중공동북국의 蕭勁光, 朱理治 등이 평양을 방문했다. 이들은 국공내전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북한의 중요도시에 판사처(辦事處)를 설립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임시정부와 교섭을 거듭한 결과 1946년 9월 朱理治 등이 이민공사(利民公司)의 명칭으로 북한에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북한 정부는 이 단체에 북한화교 관리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민공사는 이를 수용했다. 그 결과 1946년 11월 경 북한의 조선노동당 산하에 화교를 관할하는 기관인 중앙교무위원회(中央僑務委員會)가 조직되었고, 화교의 유일한 단체인 북조선화교연합총회(北朝鮮華僑聯合總會)도 성립되었다.

 

중앙교무위원회의 초대 주임에는 당시 북한정부의 내무상(內務相)이었던 박일우가 취임했고, 서기장은 음악가 鄭律成의 애인이자 중국공산당원이였던 정설송(丁雪松)이 임명되었다. 박일우는 일제 식민시기 중국공산당에 참가하고 중공해방구(中共解放區)에서 현(縣)의 당서기를 지낸 인물이다. 박일우는 화교관리 업무를 거의 정설송에게 맡겼다. 또한 박일우는 화교연합회의 창건과 운영을 중국 측에 일임(一任)했는데, 이것이 후일 화교연합회의 소속문제를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사진 2  화교연합회 제1차 道委員長 宴席會 기념사진(1943.3)

화교연합회 제1차 道委員長 宴席會 기념사진(1943.3).JPG

                       주: 정설송은 앞줄 우측 3번째

 

화교연합회 설립의 가장 큰 문제는 핵심간부의 부족이었다. 정설송은 주리치의 도움을 받아 중공화동해방구(中共華東解放區)와 대련에서 왕정야(王靜夜), 팽광함(彭光涵) 등의 인물을 확보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47년 2월 1일 북조선화교연합총회가 평양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해방직후 북한화교가 자발적으로 조직한 화교회는 해산되었다. 화교회의 일부 간부는 화교연합회의 지방간부로 옮겨갔다. 그 결과 평양화교연합총회와 신의주, 남포, 만포, 나진 등 중공판사처가 있는 지역의 화교연합회 요직에는 중국공산당원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한편, 책임자 아래의 직원이나 중공판사처가 없는 지역의 연합회 간부는 화교로 채워졌다.

 

【북한화교와 한반도 1】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吴殿尧·宋霖(2007), 『朱理治传』,中共党史出版社

人民音乐家郑律成纪念馆(http://www.zhenglvcheng.net/z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