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날 혹은 땀 흘리며 운동한 후 들이키는 맥주 한 잔의 짜릿함이란 술을 즐기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두 번쯤은 경험했을 법하다. 그래서 맥주 광고는 늘 젊음의 상징이 되고 싱그러움의 대명사가 되지 않던가. 요즘은 맥주의 종류도 다양해서 약간의 초과비용만 지불하면 세계 각국의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맥주전문점도 많이 생겨났다.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노라면 한국 맥주는 밍밍하다는 둥 싱겁다는 둥 잡담을 섞어가며 평소에 먹지 못했던 맥주를 고르느라 동공이 넓어지곤 한다. 그중, 냉장고의 한 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칭다오 맥주는 세계 유수의 맥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맛과 풍미를 지니고 있다.
‘칭다오(靑島)’ 하면 먼저 ‘칭다오 맥주’가 떠오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칭다오 맥주의 역사는 칭다오의 근대 도시 발전사와 궤를 같이 한다. 칭다오의 근대적 발전은 1898년 칭다오가 독일의 조차지가 되면서 시작되었고, 조차지에 독일인을 비롯하여 유럽인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이 맥주를 즐기기 위해 독일식 맥주회사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근대시기 중국의 해안 도시들이 열강들의 조차지(혹은 조계지)가 되어 개항과 더불어 식민지배를 받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칭다오 역시 1897년 산둥성에서 두 명의 독일인 선교사가 피살된 것을 계기로 독일 정부가 교주만을 점령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은 이 조그만 어촌을 빼앗다시피 하여 조차지로 승인받았던 것이다. 북쪽 해안가의 대표적인 항구도시 다롄, 톈진, 웨이하이 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식민도시가 되었다. 이들 도시들의 식민 경험은 도시의 발전과정에서 사회경제적 구조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다.
사진 1 칭다오 전경
실제로 칭다오는 근대시기 독일과 일본의 식민지배하에서 성장했고 그 시기 도시의 발전이 곧 현재의 칭다오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칭다오 맥주는 1903년 영국인과 독일인의 합자로 설립된 ‘게르만맥주회사칭다오주식회사’에서부터 출발했다. 설립 초기에는 회사의 생산 설비와 맥주 제조에 필요한 보리, 홉(hop: 씁쓸한 맛과 향을 내는 맥주의 원료)을 독일에서 가져와서 칭다오 라오산(嶗山)1)의 맑은 물로 양조한 것이 바로 지금의 칭다오 맥주이다. 독일은 1516년, 맥주를 만들 때 홉, 보리, 물외에는 넣지 말라는 ‘맥주 순수령’까지 제정했다고 하니 독일인의 맥주 맛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만하다. 술을 빚는 데에는 제조 방법이나 기술 못지않게 깨끗한 물 또한 중요하다. 심지어 칭다오 맥주는 중국 각지의 공장에서 생산되는데, 특히 칭다오 몇 공장에서 생산되는 그것이 가장 맛있는 진짜 칭다오 맥주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그 고장의 ‘물’이야말로 다른 것과 구별 짓는 독특함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일의 맥주공법과 라오산의 물, 이 양자의 만남이 칭다오 맥주의 맛과 풍미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사진 2 칭다오맥주 박물관
칭다오는 17년간 독일의 조차지로서 국제상업무역도시 혹은 항구도시로 성장했다. 1차 대전폭발 후 독일은 칭다오에서 물러났지만 그 자리에 일본이 대신 들어왔다. 일본은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하고 만주와 산둥지역에 큰 관심을 보여 오더니 독일이 물러나자 칭다오를 점령한 것이었다. 1919년 발생했던 오사운동의 도화선이 바로 칭다오의 주권 회수문제였던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1914년부터 일본은 칭다오를 8년간 지배하면서 면방직 공업, 맥주공업 등을 일으켰다. 이는 칭다오가 단순한 상업도시가 아니라 상업무역과 공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6년부터 칭다오 맥주는 일본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회사 이름도 ‘대일본맥주주식회사청도회사’로 개칭되었다. 이 때는 맥주 생산량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최고 생산량은 4,663톤이었다. 상표도 아사이(朝日), 기린(麒麟), 칭다오 등의 브랜드를 갖추고 있었고 중국 국내 각 도시에 판매되었다. 1922년 북경정부가 칭다오의 주권을 회수하면서 일본은 칭다오에서 물러났다. 몇 년간 북경정부의 통치하에 있던 칭다오는 장졔스의 남경국민정부가 수립되고 1929년 칭다오시가 설치되자 그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산둥이 일본에 점령당하면서 1938년 칭다오는 다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칭다오맥주는 다시 남경국민정부 지배하에 귀속되었다. 남경국민정부하에서 1945년 회사 명칭도 ‘칭다오맥주회사’로 개칭되었고, 2년 뒤에는 ‘칭다오맥주공장’으로 개칭되었다. 이 시기 최고 생산량은 2,800톤으로, 생산품은 주로 국내에서 소비되었고 일부는 싱가포르, 말레시아 등에 수출되어 화교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가 되었다. 칭다오맥주는 중국인과 중국인 디아스포라의 맥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에 의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칭다오 맥주회사는 국유기업이 되었다. 칭다오맥주는 계획경제 하에서 계속되었던 국유기업의 정경유착과 독점의 폐해 때문에 오히려 그 경쟁력은 떨어지게 되었다. 생산량은 점점 줄어들고 시장 점유율도 감소되어 1980년대 13.6%였던 것이 1992년에는 1.3%로 대폭 줄어들었다. 침체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칭다오맥주는 1992년 9월, 국유기업의 주식제 전환 시범기업 중의 하나로 선정되면서 회복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기사회생에 성공한 칭다오맥주는 1993년 6월에 홍콩증시에 상장했고, 8월에는 상하이증시에도 상장함으로써 건재를 과시했다. 칭다오맥주는 중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대륙과 홍콩에 상장한 기업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2002년에는 중국 기업 중에는 처음으로 대만시장에 진출해서 주목을 받았다. 2014년 현재 칭다오맥주는 전국 20여개의 성, 직할시, 자치구에 60여개의 맥주생산기업을 가지고 있으며, 회사의 규모나 시장 점유율에서 중국 최고의 선두기업으로 꼽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한국, 일본 등 현재 세계 90여개 국가와 지역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칭다오 맥주가 유독 미국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중국산’ 하면 품질이 낮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칭다오맥주는 ‘중국산’임을 드러내지 않고 ‘칭다오맥주’ 브랜드만을 앞세워 광고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칭다오맥주는 ‘중국인의 맥주’가 아니라 ‘세계인의 맥주’라는 것이다.
칭다오맥주는 1991년부터 매년 8월 둘째 주말부터 2주간 맥주 축제를 열고 있다. 칭다오맥주는 이제 세계적으로도 마니아층을 확보하여 칭다오의 문화 브랜드가 되었고 칭다오의 자랑이 되었다. 세계 3대 축제의2) 하나로 불린다는 독일의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듯, 칭다오의 맥주축제도 칭다오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칭다오 맥주축제에는 세계의 유명 맥주회사들이 참여함으로써 그 명성이 커지고 있다. 칭다오 맥주축제는 중국 맥주 시장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세계 맥주상인들에게 중국 맥주시장의 잠재력이나 중국인의 맥주 소비 성향 등에 대한 정보를 얻는 통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지속적으로 인터넷플러스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중국 정부의 지지를 기반으로, 칭다오맥주는 이제 인터넷 플러스와 마케팅을 결합한 전략을 내놓고 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모바일앱으로 맥주를 주문하면 인근 편의점까지 신선한 맥주를 배송하고, 편의점이 이를 다시 가정까지 배달하는 O2O 플랫폼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3 칭다오맥주 축제
이렇듯 칭다오 맥주는 여러 정부의 손을 거치면서 가히 파란만장한 역사를 경험했지만 이제는 세계적인 맥주로 거듭나게 되었다. 다만 식민의 유산이 칭다오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인들은 칭다오 맥주의 생산지가 유교의 근원지인 산둥에서 탄생했으므로 칭다오 맥주 속에는 이미 유교문화가 녹아들어 있다고 말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딘지 옹색하다. 한편으로는 거부하고 싶고 한편으로는 살리고 싶은 식민의 유산, 한국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버리자니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살리자니 식민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칭다오맥주를 만든 것은 칭다오 시민들이고, 칭다오의 상징이 된 칭다오맥주는 역사의 긴 터널을 견뎌온 칭다오 시민들의 피와 땀의 결과일 것이다. 오로지 식민당국의 통치의 결과가 아닐진대 그것 또한 칭다오 시민들이 안고 가야할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중국도시이야기 3】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라오산은 중국 도교의 한 교파인 전진교(全眞敎)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라오산 풍경구에 위치한 태청궁(太淸宮)은 2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도교 사원이다. 라오산은 물이 좋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라오산을 브랜드로 한 ‘라오산맥주’도 생산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 옥토버페스트는 브라질 리우 카니발, 일본 삿포로 눈축제와 함께 세계 3대 축제로 꼽힌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참고문헌
毛登科, 「試論青島啤酒的歷史與文化現狀」, 『南宁職業技術學院學报』 2013-1.
况宗红, 「啤酒節與靑島城市發展」, 『科技信息』 2010-1.
포스코경영연구원, 「칭다오맥주도 이제 “인터넷+” 마케팅」, 『CHINIA Plus』 106권, 2015.
칭다오맥주 홈페이지(www.tsingtao.com.c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