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는 지난 호에 이어 인천화교소학 분교의 하나인 용현분교를 소개하고자 한다. 용현분교는 용현동(인천시 남구) 일대에 거주하던 화교의 자녀들이 다녔던 화교소학이다.
분교 설립 이전에는 용현지역의 화교학생들이 선린동의 인천화교소학까지 통학해야만 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천화교소학이 휴교하게 되면서 용현지역의 화교학생들은 화교지도자 손희정(孫希亭)의 집에 모여 학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피난에서 돌아온 인천화교들 사이에서 인천화교소학을 복원하자는 논의가 오가던 중, 용현지역의 화교지도자들이 용현분교의 건립을 제의하였다. 특히 왕천광(王泉光, 산동 용성출신)은 분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며, 자신의 토지 228평과 창고 한 채를 기증할 의사를 밝혔다. 다른 화교들도 분교 건립에 동의하여, 전 인천화교사회의 지원으로 분교 건립이 추진되었다. 다만 교실이 협소한 관계로 저학년들만 용현분교에서 공부하고 고학년들은 그대로 인천화교소학에 다니는 것으로 하였다.
설립 당시 분교의 학생 수는 약 60-70명이었으며, 행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 인천화교소학에 예속되어 운영되었다. 몇 년 후 1954년, 분교의 운영을 담당했던 왕천광이 부산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아들인 왕소계(王昭楷)가 분교의 사무를 맡게 되었다. 이후 분교의 학생 수는 점차 증가하여 운영경비 면에서도 자립할 수 있었다. 이 시기부터 용현분교는 주안분교와 마찬가지로 ‘행정 예속, 경제 독립’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1963년에는 학생 수의 지속적인 증가로 인해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왕소계가 인천시로부터 임대한 토지 100여 평을 학교에 기증했다.
그러나 1968년 인천시 도시개발계획에 의해 용현분교 자리에 30m의 대로가 나게 되어 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다행히도 인천시의 협조와 인천화교사회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968년 말 새로운 교사(校舍)가 세워졌다. 당시 용현분교에 다니는 학생이 100여 명이 넘을 정도로 학생 수도 증가했다. 용현분교는 그 후에도 10년 간 무탈하게 운영되었지만, 안타깝게도 1987년에 들어와서 학생 수의 감소로 폐교하고 말았다.
용현분교 단체사진(1954년)
용현분교 단체사진(1963년 추정)
이민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코디네이터
참고문헌
杜書溥, 『仁川華僑教育百年史』, 2012.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에서 진행한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