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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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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학생들의 학군 개척기 _ 이민주

인천화교소학은 한국화교사회 최초의 화교 교육기관으로, 1902년 개교 이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운영되어왔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으로 생업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임시 교사(校舍)를 마련하여 수업을 이어갔고, 거주지 일대가 포격을 받아 생활기반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인천화교소학의 건물을 재건하였다.1) 이처럼 당시 화교들의 자녀교육열은 요즘의 8학군 학부모에 못지않.

 

인천화교사회에는 인천화교소학 외에 분교들도 있었다. 이 분교들은 인천화교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현재의 인천시 중구 선린동 일대(일명 인천차이나타운)가 아닌 주안, 용현, 부평 등지에 거주했던 화교들의 자녀를 위해 운영되었고 60-70년대에 모두 문을 닫았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세 지역의 분교들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주안분교

 

1963년 졸업앨범에 수록된 주안분교 단체사진

주안분교(1963년).jpg

 

주안분교는 세 지역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946년에 설립되었다. 주안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상당수가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농회(農會)를 중심으로 화교사회가 유지되었다. 당시 농회회장 주종영(周鍾英)을 비롯한 여러 화교들은 자녀들이 매일 먼 거리를 통학해야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분교 설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주안지역 화교사회에서의 대대적인 모금과 인천화교소학 및 상회(商會)의 협력 하에 현재의 석바위 부근에 3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였고, 이춘분(李春芬) 교사를 초빙하여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농회회장 겸 주안분교 동사 주종영(周鍾英)

주종영.jpg

 

1964년 졸업앨범에 수록된 주안분교 단체사진

3-13-1 53p-3_64 朱安分校(1964년 졸업앨범).jpg

 

1965년 졸업앨범에 수록된 주안분교 단체사진

주안분교.jpg

 

주안분교는 설립 초기에 기존 인천화교소학과는 별개로 정부의 승인을 얻어 독자적으로 운영되었으나, 학교운영상황이 나빠져 19518월 인천화교소학에 예속되었. 1956년부터는 다시 상황이 회복되어 행정 예속, 경제 독립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 후 학생 수도 나날이 증가하여 교실이 부족하게 되자 1960년에는 새로운 교사를 건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인토지소유법이 개정되면서부터 주로 농원(農園)을 운영해온 주안지역의 화교사회는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많은 화교들은 다른 지역 혹은 나라로 이주하였고 화교학생들 역시 급격히 감소하여 1976년 주안분교는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이민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코디네이터


                                       

 

1) 이에 관해서는 201512중국관행웹진641955년 인천화교소학의 재건에서 소개한 바 있다.

 

참고문헌

杜書溥, 『仁川華僑教育百年史』, 2012.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에서 진행한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