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국공내전이 한참일 때, 공산당 인민해방군이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차츰 전세를 뒤집자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관중은 진입했겠지. 함양은 얼마나 남았나?” 인민해방군 정치부 부주임을 지낸 푸종(傅鍾)의 회고록에 나온 이야기다. 마오쩌둥의 비유가 흥미롭다. 자신과 장제스의 싸움을 유방과 항우의 초한지 대결에 빗댄 말이다. 관중은 산시성 중부 일대 지역이고 함양은 진나라의 도성이었던 곳이다. 객관적 전력은 약세였지만 결국 유방이 항우를 물리친 것처럼 자신이 장제스를 꺾고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내비친다. 이 자신감은 훗날 현실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유방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 같다. 유방이 민심을 중시하고 현실적인 상황 판단이나 용인술을 펼쳤던 것이 하층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름의 분석도 했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평이기도 하다. 더 비슷하고 극적인 공통점도 있다. 유방의 홍문연과 마오쩌둥의 중경 회담이다.
사진 1. 홍문연(鴻門宴)
홍문의 연회
진시황 사후, 천하의 패권을 놓고 유방과 항우가 대결했다. 먼저 관중을 점령하는 자가 관중을 갖는다는 초 회왕의 선언이 있었다. 관중은 진시황의 권력과 위상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먼저 도착한 것은 유방이었다. 유방은 10만의 군사로 패상에 주둔했고 얼마 후 항우의 40만 대군이 홍문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약속에 따라 유방이 황제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전력의 격차가 명백했기 때문에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위기를 느낀 유방은 살아남기 위해 한껏 자신을 낮췄다. 항우에게 관중을 바치기 위해 미리 와서 잘 관리하고 있었다고, 함곡관에 군사를 배치한 것은 도적의 출입과 비상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호소했다.
유방의 참모 장량과 항우의 숙부 항백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항백의 중재로 유방은 항우와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홍문 항우의 진영. 유방의 입장에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셈이고 항우의 입장에서는 유방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마천의 <항우본기>는 그들의 좌석 배치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항우의 아부(亞父) 범증이 북쪽에, 항우가 그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또 유방이 남쪽에, 장량이 그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고대에는 군주가 남면(南面)하고 신하가 북면(北面)했다. 이날의 연회는 서로의 관계를 명확히 정립하는 자리였다.
범증은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항우가 미적이며 타이밍을 놓쳤다. 조급해진 범증이 항장에게 검무를 추다가 유방을 찌르라고 했다.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항백이 일어나 함께 검무를 추며 막아주었고 장량은 연회장을 나가 번쾌를 불렀다. “항장의 검무는 의도가 패공에게 있다(項莊劍舞, 意在沛公)”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2016년 사드배치로 한중관계가 경색되었을 때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인용해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말이다. 번쾌가 거칠게 호위병을 밀치고 연회장으로 들어와 항우를 노려봤다. 홍문연 사건의 하이라이트다. 번쾌는 유방의 동서이자 백정 출신의 거칠고 사나운 터프가이다. 항우는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의 상남자를 만나자 평정심을 잃었다.
항우는 번쾌에게 “장사로다”라고 하며 술을 내렸다. 번쾌가 방패 위에 돼지 넓적다리를 올려놓고 생으로 잘라먹었다. 항우는 또 “장사로다”라고 하며 술을 더 마실 수 있는지 물었다. 번쾌는 “신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터프가이끼리의 기싸움에서 항우가 밀렸다. 성질과 기세로는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너무 강력한 상대를 만났다. 기가 질린 항우는 번쾌의 논박에 대응하지 못했다. 덕분에 유방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왔다.
사진 2. 1945년 중경 회담
1945년 중경 회담
일본이 패망하자 장제스가 마오쩌둥을 중경으로 초청했다. 국가재건과 평화유지를 위해 두 사람이 만나 제반 문제를 논의하자는 제안이었다. 미국과 소련도 회담의 성사를 위해 양측을 압박했다. 마오쩌둥으로서는 평화와 단결을 거부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신상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서안사변의 전례도 있었던 만큼 암살이나 구금 등의 위험도 있고, 마오쩌둥을 인질로 잡고 군사작전을 할 수도 있다.
마오쩌둥은 이해득실을 신중하게 계산한 후 초청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류샤오치를 자신의 직무대리로 맡기고 저우언라이, 왕뤄페이 등과 함께 가기로 했다. 1945년 8월 28일 중경 쥬룽포(九龍坡) 공항에 내린 마오쩌둥은 홍문에서의 유방처럼 철저히 자신을 낮췄다. 마중 나온 사람들 앞에서 “장위원장 만세”를 몇 번이나 외쳤고 연회장에서도 “신중국 만세! 장위원장 만세!”를 외쳤다. 그는 장제스를 위원장이라 불렀고 장제스는 그를 윤지(潤之)라고 불렀다. 윤지는 마오쩌둥의 자였다. 서로의 상하관계가 명확한 호칭이었다. 장제스는 이때의 일을 “마오쩌둥은 과연 부름에 응해(應召) 중경으로 왔다”고 일기에 적었다. “應召(응조)”는 군신관계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극진하게 대하며 긴장을 풀지 않았다. 자신은 하루 세 갑씩 담배를 피울 정도로 골초였지만 장제스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얘기하면서 8시간 동안 담배를 참기도 했다. 연회에서는 저우언라이가 장량의 역할을 맡았다. 마오쩌둥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의 술잔을 대신 받아마셨다. 음식도 먼저 시식했다. 장제스와 국민당 인사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회담에서도 해방구 문제, 군대 조직재편 문제 등에서 많은 양보를 했다. 팔로군 중경사무소 비서였던 리샤오스가 국민당 병사에게 사살된 아찔한 사건도 있었다. 실제로 국민당 비밀 정보기관에서 마오쩌둥 암살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결국 마오쩌둥은 살아서 연안으로 돌아왔다. 쌍십협정을 체결하며 중공의 지위를 승인받았고 중경의 민주인사들은 “하늘을 가득 메운 큰 용기”라고 그를 예찬했다.
2009년 <건국대업>
장제스와 항우도 닮은 점이 있다. 항우가 역발산기개세의 용장인 것처럼 장제스는 황포군관학교 교장 출신의 군인이다. 항우에게 <패왕별희>의 우희가 있다면 장제스에게는 <송가황조>의 송미령이 있다. 가장 강력한 공통점은 필생의 라이벌을 넘지 못한 패배자라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대륙에서 제작된 영화에는 장제스의 캐릭터에 종종 항우의 이미지가 느껴질 때가 있다. 2009년의 <건국대업>이 그랬다. 음험한 논의는 참모들이 했고 장제스는 주로 하늘을 보며 조국의 앞날을 근심했다. 역사니 운명이니 하는 추상적인 대사들이 많았다. 당시는 대만을 포용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장제스의 이미지에 신중했던 것 같다. 무턱대고 잔인한 악당으로 묘사할 수 없었다. 패망의 순간에 장제스는 “운명이다. 국민당이 자기 손바닥에서 망하는구나”라고 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다”는 항우의 말과 묘하게 비슷하다. 장제스를 우호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성공적이었다. 장제스를 연기한 장궈리(張國立)는 인상이 선하고 부드러웠다. 항우를 동정하는 중국인들의 심리가 반영된 연출이었다.
장제스와 항우의 말로는 달랐다. 항우는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강을 건너지 않고 자살했다. 자신을 따라온 강동 자제 팔천 명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형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바다를 건너가 대만에서 자신의 정권을 세웠다. 항우의 자존심이 더 강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장제스의 의지력이 더 강했다고 해야 할까?
이규일 _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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