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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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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방과 북방의 지역감정 _ 이규일

베이징 사람들은 낭만적이라 종종 나는 베이징을 사랑해(我愛北京)’라고 말하지만 상하이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라 나는 상하이를 사랑해같은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중국의 현대 문인 왕안이(王安憶)의 말이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상징하는 도시이다. 각각 북방의 대표이고 남방의 대표다. 사람들의 기질도 다르다. 북방 사람들은 호탕하고 남방 사람들은 실리에 밝다고 하는데 사실상 베이징과 상하이 두 지역 사람들에 대한 총평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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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1990년대 중국 TV 연속극 <갈망(渴望)>


1990년 중국 중앙방송국(CCTV)에서 방영된 연속극 <갈망(渴望)>에는 후성(滬生)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인정미가 없고 이해관계에 철저한 캐릭터였다. 후성의 후()는 상하이 지역의 약칭이다. 상하이 사람들을 쩨쩨하다고 흉보던 베이징 사람들에게 즐거운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두 지역의 문화를 지칭하는 경파(京派), 해파(海派)라는 용어도 있고 서로에 대한 우월감과 경쟁심도 중국 문화의 흥미로운 화두이다.

 

상하이가 지금의 국제도시가 된 것은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지만 이 지역에 대한 북방 사람들의 감정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오나라 출신들의 일화에 이런 얘기가 많다. 오나라의 수도는 건업(建業), 지금의 남경이었다.



<삼국지>에 관우가 오나라의 군주 손권에게 오소리 새끼가 감히!”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소리 새끼(狢子)”는 중원에서 오나라 사람들을 멸시하는 유행어였던 것 같다. 진 무제가 후비의 여동생을 손수에게 시집보냈더니 자주 남편에게 오소리 새끼(狢子)”라고 욕했다고 한다. 또 육기도 말년에 낙양에서 군사를 통솔할 때 부하에게 오소리같은 종놈(狢奴)”이라고 모욕을 받았다. 손수, 육기는 오나라가 패망한 후 낙양에 온 사람들이다. 조국을 멸망시킨 적국의 수도에 와서 활로를 개척해야 했으니 괴로운 심경이었으리라. 오나라 출신들은 정치적으로 피정복자라는 심리를 극복해야 했고, 패망국의 유민이라는 멸시에 대응하는 방어논리가 필요했다.

 

채홍이 낙양에 갔을 때 낙양 사람이 물었다. “그대는 오나라 출신이고 망국의 유민인데 무슨 특별한 재능이 있어 이번 천거에 응시했는가?” 채홍이 대답하여 말하길 야광구슬이 반드시 맹진(孟津)의 물에서 나지는 않으며 한 줌 가득한 옥도 반드시 곤륜산(昆侖山)에서만 나지는 않습니다. 옛날 무왕이 주()를 정벌하고 은의 유민을 낙양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당신들은 그 후손들 아닙니까?”

 

<세설신어>의 기록이다. 채홍이 낙양 사람의 공격을 받아치는 내용이 흥미롭다. 따지고 보면 낙양 사람들도 옛날 은나라의 후예들이니 피차 유민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반격이다. 날카로운 논리다. 비슷한 일화가 또 있다.

 

오나라가 평정된 후 왕혼(王渾)이 건업궁에서 술을 마셨다. 얼큰하게 취하자 오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망국의 유민이 되었으니 슬프지도 않소?” 주처(周處)가 대답했다. “한나라 황실이 무너지고 삼국이 정립되었다가 위나라가 먼저 멸망하고 오나라는 후에 멸망했습니다. 망국의 슬픔이 어찌 한 쪽에게만 있겠습니까?” 왕혼이 부끄러워했다.

 

위나라의 신하였던 사마염은 힘과 세력으로 정권을 탈취해 진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15년 후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주처의 말은 당신도 지금은 진나라 사람이지만 얼마 전까지 위나라 백성이었다는 것이다. 왕조의 교체와 역사의 흐름으로 보자면 피차 망국의 유민이긴 마찬가지인데 누가 누구에게 거드름을 피우냐는 말이다.

 

같은 패망국이지만 오나라 출신들은 촉나라 출신들보다 더 차별을 받았다. 삼국이 통일된 후 무제 사마염은 양국의 유민들을 이렇게 평했다. “촉나라 사람들은 복종하여 다른 마음을 갖지 않는데, 오나라 사람들은 발끈하며 자주 요망한 짓을 한다.” 황제의 인식이 이렇다보니 촉나라 출신들은 많이 등용됐지만 오나라 출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형주, 양주는 가구가 각각 수십만이지만 한 사람도 경성에서 관직을 하는 이가 없다는 상소도 있었다. 오나라 출신들은 통일 후에도 중원에 대한 적개심과 반발심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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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서진의 문인 육기(陸機)


오나라가 망한 후 낙양에 온 사람 중 가장 거물은 육기였다. 육기는 육손의 손자로 오나라 최고 엘리트 가문의 후예였는데 당시 문단의 영수 장화가 동오를 평정한 이익은 두 준걸을 얻은데 있다며 육기 형제를 반겼다. 하지만 낙양의 저명인사들은 대부분 육기를 무시했고 육기는 자주 그들과 충돌했다.

 

노지가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육기에게 육손, 육항은 당신에게 어떤 놈인가?”라고 묻자 그대에게 노육, 노정과 같소라고 대답했다. 육운은 안색이 변했다. 집을 나선 후 형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의 얼굴을 보니 정말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육기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우리 아버님과 조부님의 명성은 천하에 자자한데 어찌 모를 수가 있는가? 귀신의 자식이, 감히!”

 

육기는 또 낙양의 문사 반악(潘岳)과 시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 일이 있다. 권력자 가밀(賈謐)이 자신의 사조직 이십사우(二十四友)에 육기를 데려오려고 반악에게 시를 쓰게 했다. 그런데 반악이 쓴 <위가밀작증육기일수(爲賈謐作贈陸機一首)>에는 오나라가 왕을 사칭했다”, “괴뢰 손씨 정권처럼 육기의 조국을 모욕하는 표현이 들어있다. 반악과 육기는 거의 교류가 없는 사이였다. 개인적 감정이라기보다는 정복자의 우월감이 반영된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육기는 반악이 아니라 가밀에게 화답해야 했기 때문에 완곡하고 우회적인 표현으로 화답시를 썼다. 제목은 <답가장연일수(答賈長淵一首)>. “하늘이 패덕(覇德)을 미워하니 위()의 국운에 흉조가 들었네. 민심은 위()를 떠나 진()으로 모여들었지”, “황제께서 선양을 받으시니 촉도 머리를 조아리고 오도 조공을 바치네.” 육기의 생각은 이렇다. 한나라가 망하면서 위, , 오 삼국은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정권을 세웠기 때문에 누가 정통이고 누가 사이비라는 구분은 부질없다. 다만 하늘이 패덕을 미워했기 때문에 진이 대권을 받은 것이고 오와 촉의 옹호를 얻게 된 것이다. 앞서 소개한 주처의 논리와 비슷하다.

 

이십사우에는 반악 외에도 석숭, 좌사, 유곤 등 쟁쟁한 문인들이 많았다. 육기는 이 모임이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 되어주길 기대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내부의 어떤 소집단에도 끼지 못했고 글로 왕래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훗날 육기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던 사람도 이 모임의 일원이었다. 육기는 화정(華亭)의 학 울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라는 말을 남기고 처형됐는데 화정은 지금의 상하이시 송장(松江)이다. 중원에서 배척당한 상하이 남자의 쓸쓸한 최후다. 현대 중국정치 계파 상하이방(上海帮)이란 말이 생각난다.

 

중국의 남방과 북방은 지리적 환경의 차이도 크지만 사람들의 언어와 체형, 기질과 풍습도 크게 다르다. 모든 면에서 서로에게 이질감이 클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축적된 대립과 적개심도 남북방 지역감정의 형성에 한몫했을 것이다. 루쉰도 말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침략자들은 북쪽에서 와 북방을 점령한 후 북방인을 시켜 남방을 정복했다고. 그래서 북방인들은 남방인들을 피정복자로 보는 거라고.



이규일 _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1: https://www.imdb.com/title/tt1162644/

사진2: https://baike.baidu.com/item/%E9%99%86%E6%9C%BA/526693?fr=kg_gener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