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868년에 수정한 헌법 제 14조(14th Amendment)를 통해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은 법의 동등한 보호를 받는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까지도 그 원칙은 공공연히 비틀어져 종종 법정 투쟁을 통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었다. 특히 인종적 분리에 의한 차별은, 수정헌법 이전인 1865년부터 시행되던 짐크로우법(Jim Crow Law)이 잔존하면서 1964년 인종·민족·국가·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는 '연방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이 제정되기까지 약 100여 년간 백인 외 미국인들의 평등한 권익 보호를 비껴갔다. 짐크로우법은 뮤지컬의 바보 흑인 캐릭터 이름을 가져와 붙인 명칭에서부터 흑인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는 규정으로, 이후 오랫동안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이 식당 · 화장실 · 극장 · 버스 등 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어울리지 못하게 분리시키며 차별하는 것을 허용한 법이다. 수정헌법 14조에 반하는 위헌적 법령이었으나, 백인들은 유색인 전용 시설을 만들어 “분리하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라는 궤변적 원칙 하에 지속하였다.
유색인종에 대한 분리주의 관행 중 교육 분리주의에 맞섰던 투쟁은 1954년 흑인 소녀 린다 브라운(Linda Brown)의 케이스로 대표된다. 캔사스 주에서 딸의 공립학교 입학이 거부당한 데 대해 린다의 아버지가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이 만장일치로 “공립학교에서 분리주의에 의해 입학을 거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케이스는 인종차별 운동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브라운 케이스보다 70년 먼저 중국인 이민자 테입 가족이 인종 분리에 의한 교육 차별에 저항하여 승소한 선례를 1885년에 남긴 바 있다.
사진 1. 테입 가족(Tape Family, 1880년 대)
샌프란시스코의 백인 거주지역에 오래 살았던 테입 가족은 큰 딸 메이미(Mamie)가 학교 갈 나이가 되어 거주지 내 학교(Spring Valley Primary School)에 입학하려다 거부당하자, 부당한 사유를 들어 거부한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Tape v. Hurly 1885). 교장 헐리가 거부 사유로 제시한 것은 ‘아동의 행동거지가 학업 환경을 해치거나 전염병을 지닌 경우 입학을 거부할 수 있다’는,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위원회의 방침으로서, 아무 병이 없고 행동이 바른 메이미에게 이 방침을 적용한 것은 평등의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모든 중국계 아동을 위험하고 더럽다고 가정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는 남북전쟁 직후부터 시행되던 짐크로우법에 의해 공공기관에서 흑인 및 인종 구분이 애매한 유색인들을 백인과 분리시키는 것이 용인되는 시기였을 뿐 아니라, 중국인 배척법이 통과된 후에도 가시지 않은 혐오와 폭력에 중국인들이 크게 위축되던 때였다. 테입 부부는 둘 다 10대에 미국에 건너간 이들로, 아버지 조세프는 자수성가하여 백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사업가였고 어머니 메리는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한 후 기독교 절차에 따라 조세프와 결혼한 이로서, 언어와 복장, 생활방식 면에서 완전히 서구화된 이들이었다. 1885년 3월 고등법원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메이미의 입학을 거부하는 것은, 주 내의 모든 아이들이 공립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 1880년 캘리포니아 학교법을 저촉하는 것일 뿐 아니라, 미국 수정헌법 제 14조가 규정하는 동등 보호권(right to equal protection)을 침해하는 것”이라 판결하며 테입 가족에게 승소를 안겨주었다. 대법원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교장은 백신 증명서가 부족하다는 등 여러 이유를 들며 다시 입학을 거부했다. 메리 테입은 일간지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에 “중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치욕인가? 우리는 모두 신의 자녀가 아니던가?... 메이미는 어느 누구보다 더 미국인다운 미국인이다”라고 분노에 찬 글을 실었다. 그러나 법정에서 ‘분리하되 평등하게’라는 교조에 대해 경고를 하지 않은 것을 기화로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는 ‘중국계 미국인과 몽골리안 아이들’을 위한 분리된 학교를 승인하는 주 법을 재빨리 통과시키고 차이나타운에 중국인 학교를 세웠다. 테입 가족은 교육 시기를 놓칠 수 없어서 메이미와 남동생을 차이나타운 학교에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립학교의 분리를 승인하는 캘리포니아 정책이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후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을 때 막내는 지역 공립학교에 갈 수 있었고, 그 판결 이후로 테입 가족 뿐 아니라 점차 많은 중국계 아이들이 샌프란시스코의 백인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사진 2. 럼 가족(Lum Family)
그러나 분리주의에 저항한 중국계 거주자들의 시도가 모두 긍정적인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일례로 테입 케이스 판결 40여년 후 제기된 또 다른 중국인 가족 럼이 제기한 소송(Lum v. Rice 1927)을 보자. 아시아인 전체 이민을 금하는 1924년의 이민법 이후, 미시시피의 공립학교에 다니던 럼의 두 딸은 앞으로 학교에 나오지 말고 근처 유색인 학교에 가라는 통보를 받았고 이에 대항하여 아버지 공럼이 소송을 제기했다. 지역 내 흑인을 대상으로 했던 열악한 조건의 ‘유색인’ 학교는 있었지만, 중국계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따로 없었던 상황에서 1심 지방법원은 럼의 딸들이 ‘유색인(흑인)으로 잘못 규정되어 쫓겨난 것’이라는 변호인의 주장에 따라 럼 가족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미시시피 대법원에서는 ‘아시아인을 백인과 구분하는 주 법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판결로 하위법원의 판결을 뒤집었고, 연방 대법원에서도 ‘주의 청소년에게 세금으로 교육을 제공하는 방식에 대한 주 정부의 권한을 인정’해야 하며, ‘근처에 백인이 아닌 유색인을 위한 학교가 있으므로 이는 14조 수정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케이스는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아시아인”의 이민을 전면 금하는 1924년 이민법 발효 직후 제기되어 백인과 아시아인과의 경계를 뚜렷이 하며 이전까지 ‘완전한 유색인’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중국인을 흑인, 아메리칸 인디언, 라티노와 함께 유색인으로 공인한 계기가 되었다.
럼 가족은 아칸소로,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분리주의가 엄격하지 않은 곳의 학교를 찾아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다른 중국인 가정도 분리주의 교육을 인정한 판결의 여파을 피해 미시시피를 떠났고 어떤 이들은 사립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이들은 럼 가의 어머니 캐더린(Katherine Lum)이 “내 딸을 흑인 학교에 보낼 수는 없다”고 한 말로 인해 흑인을 기피하는 모양새가 되어 후대에 그들도 인종주의적 인식을 내보였다는 비판을 들었다. 아버지 주공럼(Jeu Gong Lum)은 노예 노동을 대체할 노동력 부족으로 중국인 배척법에 대한 감찰이 덜한 남부에 정착, 주로 흑인을 대상으로 한 식료품점을 운영하면서 상인 자격을 획득하고 배제법의 면제를 받았던 터라, ‘유색인’ 학교에 대한 거부는 더 옳지 않은 인종주의적 발상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시 흑인 신문인 시카고 디펜더(Chicago Defender)에서 일갈한 것처럼 “백인 아이들이 9개월 동안 벽돌로 잘 지어진 학교에서 전문 훈련을 받은 교사에게 배우는 것과 곧 주저앉을 것 같은 허름한 곳에서 면화 따고 재봉틀 돌리는 사이 3개월쯤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 ‘교사’에게 배우는 것이 과연 재판관들이 말하는 ‘분리되었지만 평등한’ 교육인지”에 대한 답은 명백하다. 흑인 학교에 가기 싫다는 표현과 이후 중국계를 비롯한 아시아계의 인종적 편견들 또한 교정되어야 하고 미국의 인종 구조 속에서 새우등 터지는 비극을 만들어낸 요인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꼬투리 삼기에는 당시 분리주의를 유지하려는 사회적, 법적, 정책적 환경이야말로 저항할 수 밖에 없는 인종주의적 억압이었음에 논의의 여지가 없다. 해당 케이스의 패소는 의도와 달리 이후 분리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차별의 선례가 되어, 럼 가족 뿐 아니라 많은 유색인종과 민권 변호사들이 싸워야 할 장벽이 되었다. 70년 앞선 중국인 테입 가족의 선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하되 평등하게’라는 방침이 전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흑인 소녀 브라운 케이스를 통해서야 겨우 확인되었다.
※ 이 글은 졸고 「중국계 미국인의 정치성 담론에 대한 검토: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내 중국인의 시민적 저항활동을 중심으로」, 『다문화사회연구』 15권 3호(2022. 10.) 중 일부를 수정, 보완한 글이다.
【미국의 중국인 7】
정은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자료
Tape v. Hurley, 66 Cal. 473, (1885)
Lum v. Rice, 275 U.S. 78 (1927)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Smith Collection, Getty Images (테입 가족)
사진 2. http://www.gonglumvrice.com/images.html(럼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