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중심’과 ‘경제중심’은 일치해야 하는가? _ 이원준
지난 9월 18일, 이재명 대통령은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부동산 시장 안정화를 위한 방안으로 ‘수도권 1극 체제 극복’과 ‘국토 균형발전’을 제시하며,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추진해 온 행정수도 건설을 최대한 신속하게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뉴욕과 워싱턴처럼, ‘경제수도 서울’, ‘행정수도 세종’의 ‘경제·행정 2수도’ 시대”를 열겠다는 구상을 제시하였다.
발언의 분량으로 보면 전체 모두발언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또한 발언의 맥락도 부동산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에 있었던 만큼, 경제수도-행정수도 분리의 화두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한 듯하다. 세종시와 충청권의 지자체와 지역 국회의원들이 행정수도특별법 연내 제정을 위한 여론전을 전개하고 있고, 이재명 정부에서도 ‘수도권 1극 체제 극복’을 주요 국정 방침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기자회견에 관한 세간의 논의는 주로 국정 지지율 반등, 부동산 대책 등에 집중되어 있다. 포털에서 행정수도 제정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아직까지는 대부분 충청권 매체들의 기사들로 도배되고 있다.
그래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안인 만큼, 조만간 관련 움직임과 논의가 본격화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2004년에도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이라는 ‘독특한’ 논리로 행정수도 이전에 제동을 걸은 전력도 있어, 반대 진영의 반발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라 예상된다. 경제수도와 행정수도의 분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지지를 과연 어떻게 도출할 것인가에 따라 관련 정책의 성패도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80여 년 전의 중국에서도 한때 이와 비슷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전쟁이 후반으로 접어든 1940년대 초부터, 국민정부 당국과 지식인 사회에서는 ‘전후(戰後)’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말 이후로 중국 내 전선은 수년간 고착화되었고, 1941년 12월부터는 태평양전쟁 발발에 따라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중국 사회에서는 대일 전쟁의 승리를 예상하며, 전후 재건 방안에 대하여 모색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부터 시작된 건도(建都) 논쟁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전후 중국의 수도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개된 이 논쟁에는 여러 분야의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가담하였고, 일간지와 학술잡지부터 대중잡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매체를 통해 관련 담론들이 소개되었다. 국민정부에 의해 난징 환도(還都)가 공식화된 1946년 5월 5일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고, 1946년 11월에 개최된 제헌국민대회에서는 이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헌법 초안에 수도의 위치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면서, 국민대회 대표들 사이에서 수도 선정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다. 결국 장제스의 개입으로 수도의 위치를 명문화하는 조항을 아예 삭제함으로써 논쟁이 일단락되었지만, 그만큼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매우 뜨거운 관심사였음을 시사한다.

사진1(좌). 1946년 개최된 환도(還都) 기념식
사진2(우).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중산릉 참배
논자들은 베이징․시안․난징․우한 등, 각 도시가 전후 중국의 수도로 적합한 이유를 제시하기 위하여 다양한 분야의 논거를 동원하였다. 지정학적 조건과 국방 안전, 수도 위치와 왕조 성쇠(盛衰)의 인과관계, 지리적 조건, 기후와 신체적 역량의 상관관계, 교통의 편리성, 도시 기반시설의 조건, 사회적 통합의 가능성, 해외 강국들의 사례 등, 다양한 논거에 기반한 논리들이 각자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동원되었다.
이러한 다방면의 논의 가운데 주요 논거로 활용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전후 재건과 공업화에의 적합성에 관한 논의였다. 장기간의 전란에 시달렸던 당시 중국 사회에서는 ‘전후’를 대비하는 데에 있어서 국가의 안보를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안보 확립을 위해서는 국방력 강화가 필요했고, 국방력 향상을 위해서는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가 전제되어야 했다. 이는 건도논쟁에 참가하지 않은 국민정부 당국자와 경제학자들도 대부분 공유하는 문제의식이었다. 다만, 건도논쟁에서는 이 문제를 전후 수도의 위치와 연결 지으면서, 전후 수도는 중공업 중심 공업화를 추진하는 데에 적합한 곳이어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경제중심’과 ‘정치중심’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었던 베이징, 시안, 난징의 사례만 간단히 살펴보자. 베이징 건도론자들은 베이징이 위치한 화북지역이 동북지역 및 서북지역과 함께 전후 공업 발전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동북지역의 철과 화북지역의 석탄은 전후 철강공업의 기반이 될 것이고, 이 일대의 곡물 및 면화 생산은 식량 및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서북지역의 석유와 목축업은 정유업과 모직업, 축산가공업 발전의 조건이 되었다. 베이징은 그 자체로는 경제적 잠재력이 풍부한 곳은 아니었지만, 베이징 건도론자들은 베이징이 세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기능함으로써, 전후 재건의 ‘경제중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경제중심’에 ‘정치중심’이 있어야 하므로 베이징이 전후 수도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난징 건도론자들도 ‘경제중심’과 ‘정치중심’이 일치해야 한다는 관점에 있어서는 베이징 건도론자들과 같았다. 이들은 당(唐) 말 이후로 중국의 경제중심이 남방으로 이동하였고, 그 이후로 남북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확대되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래 성장한 중국의 근대 산업은 대부분 동남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전후 경제 재건의 중심도 상하이와 동남 연해지역에 두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전후 수도(‘정치중심’)는 ‘경제중심’인 상하이와 가깝고 동남 연해지역에 위치한 난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이징 건도론자들은 전전(戰前)의 동남 연해지역은 경공업 중심의 경제지대였으므로, 전후의 중공업 중심 공업화 방침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요컨대, 난징 건도론자들이 기존의 ‘경제중심’에 ‘정치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베이징 건도론자들은 미래의 ‘경제중심’에 ‘정치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들과 달리, 시안 건도론자들은 ‘경제중심’과 ‘정치중심’의 분리를 강조하였다. 한(漢)~당(唐) 시기 통일제국의 수도였던 시안은 당 말 이후로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베이징이나 난징과의 격차가 더욱 커졌다. 상대적으로 척박한 서북 내륙 지대에 위치한 시안은 경제적 조건의 측면에서는 도저히 베이징이나 난징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시안 건도론자들이 내세운 논리 가운데 하나가 ‘균형발전’의 필요성이었다. 송(宋) 이후로 지역 간 격차가 나날이 확대되면서 사회통합의 어려움이 가중되었으니, 전후 경제 재건에서는 균형발전을 도모해야 하므로, 오히려 경제적으로 낙후된 서북 지역에 수도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안을 수도로 삼으면 자본과 노동력이 수도가 소재한 서북지역으로 투입될 것이고, 이를 통해 균형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요컨대, ‘정치중심’을 ‘경제중심’과 분리시킴으로써 전국의 ‘균형발전’을 달성한다는 것이 시안 건도론의 관점이었다.
베이징 건도론자들이 바란 대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베이징은 ‘신중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와 달리, 베이징은 중국의 ‘경제중심’으로 기능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현재에 이르는 중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보면, 역시 동남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발전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베이징 건도론자였던 푸쓰녠(傅斯年)은 ‘경제중심’과 ‘정치중심’이 분리되면 ‘경제중심’이 또 다른 ‘정치중심’으로 성장함으로써 수도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지만, 1949년 이후의 역사를 보면, 중국의 ‘정치중심’은 ‘경제중심’에 대한 통제의 끈을 결코 놓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치중심’과 ‘경제중심’의 분리는 21세기 중국의 부상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1940년대 중국 사회의 건도논쟁과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성장 사례를 보면, ‘정치중심’과 ‘경제중심’이 일치해야 한다는 관념이 일반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양자의 분리가 국가 발전에 아무런 부작용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정치중심’과 ‘경제중심’의 물리적 거리를 축소하였고, 특히 COVID-19 이후 통신기술의 혁신은 그 거리를 거의 ‘0’으로 수렴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원(元)․명(明)․청(淸) 시기에도 중국의 ‘정치중심’(베이징)과 ‘경제중심’(강남지방)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중화제국’의 위세를 떨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그때는 ‘정치중심’과 ‘경제중심’을 연결하기 위하여 막대한 대운하 유지보수 비용을 들여야 했다.) 이제 ‘관습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 현실의 긴급한 사회적 수요에 대응하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때이다.
이원준 _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1, 2. 대만 국가문화기억고(https://tcmb.culture.tw/zh-t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