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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중국'은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중국·화교문화연구소의 웹진입니다. '관행중국'의 전신은 '중국관행웹진'으로 2010년 9월에 창간호를 발행한 이후 2016년 7월까지 총 70회를 발간했습니다. 71회부터는 '관행중국'의 이름으로 개편 발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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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개방 시대와 시진핑 신시대 _ 구자선

Vol.192/2026.09
시사·테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6-08-3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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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6년 8월 12일 중국의 전 국무원 총리 주룽지(朱镕基)가 9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중공 중앙,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정협은 당일 다음과 부고를 발표했다(中共中央 全国人大常委会 国务院 全国政协讣告). 최고 지도자의 부고와 다른 점은 이름을 올린 주요 기관 중에 중앙군사위원회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총리 직위가 군과는 별 관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급 인물의 부고는 해당 인물에 대한 규정, 별세 경위를 간단히 언급하고 평생의 업적에 대해 서술한다.

 

주룽지 부고의 앞 부분은 다음과 같다.

 


중공 중앙,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정협의 주룽지 동지 별세 부고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오랜 세월 검증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뛰어난 무산계급 혁명가이자 정치가, 당과 국가의 걸출한 지도자(领导人), 중국공산당 제14기·제15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전 총리 주룽지 동지가 병원 치료에도 효과를 보지 못해 2026년 8월 12일 11시 06분 베이징에서 별세. 향년 98세.


 

2023년 10월 27일 사망한 전 총리 리커창(李克强)의 부고와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주룽지와 리커창은 별세 6일 후 화장이 이루어졌다.

 


중공 중앙,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정협의 리커창 동지 별세 부고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오랜 세월 검증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뛰어난 무산계급 혁명가이자 정치가, 당과 국가의 걸출한 지도자, 중국공산당 제17기·제18기·제19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전 총리 리커창 동지가 돌발성 심장병으로 인해 전력을 다한 응급구조에도 불구하고 2023년 10월 27일 0시 10분 상하이에서 별세. 향년 68세.


 

참고로 중공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지 못한 부국가급(副国家级) 인사의 부고는 한 문장으로 매우 간략히 발표된다. 위의 예와 비교하면 ‘뛰어난 무산계급 혁명가, 당과 국가의 걸출한 지도자’라는 규정이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2026년 8월 24일 사망한 전국정협 부주석 천우(陈武)의 부고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천우의 화장은 별세 4일 후였다.

 


천우 동지 별세

중국 공산당의 우수 당원,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민족 문제와 경제 건설 전선의 걸출한 지도자, 제14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천우 동지, 2026년 8월 24일 오후 3시 5분 베이징에서 별세. 향년 72세.

 


반면, 최고 지도자급은 부고의 제목부터 격식이 다르다. 제목은 ‘전당 전군 전국 각 민족 인민에게 보내는 글(告全党全军全国各族人民书)’이다. 부고의 주체는 중공 중앙,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정협, 중앙군사위원회이다. 주룽지, 리커창의 부고와 다른 점은 중앙군위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국가 의례 가운데 가장 높은 격식의 부고로 총 세 번 발표되었다. 바로 마오쩌둥(毛泽东), 덩샤오핑(邓小平), 장쩌민(江泽民) 부고이다. 또한 특별히 장례위원회(治丧委员会)가 구성되고, 그 위원회에서 추모형식, 장례절차 등을 몇 차례 공고한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의 부고에서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당과 우리 군, 우리나라 각 민족 인민이 존경하는 위대한 영수(領袖)이자 국제 무산계급과 억압받는 민족·억압받는 인민의 위대한 스승이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명예주석.


 

마오 별세 이후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인민대회당에서 추도의식이 거행되었고, 18일 추도대회가 개최되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76년 10월 8일, 후세 사람들이 마오쩌둥을 기릴 수 있도록 그의 유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톈안먼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남쪽과 정양문 북쪽에 마오쩌둥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비교를 위해 1997년 2월 19일 발표된 덩샤오핑 부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덩샤오핑은 2월 25일 추도대회를 거행하고, 3월 2일 유언에 따라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 이전에 저우언라이(周恩来), 류샤오치(刘少奇)의 유골도 바다에 뿌려졌다.

 


덩샤오핑 동지는 우리 당과 우리 군, 그리고 우리나라 각 민족 인민이 공인하는 숭고한 위망을 지닌 탁월한 지도자(领导人)이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정치가·군사가·외교가이자, 오랜 세월 검증된 공산주의 전사이며, 우리나라 사회주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의 총설계자이자,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이론의 창립자.


 

2022년 11월 30일 발표된 장쩌민의 부고도 덩샤오핑의 부고와 큰 차이가 없다. 12월 6일 추도대회가 거행되었으며, 유언에 따라 12월 11일 창장(长江)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유골을 뿌렸다.

 


장쩌민 동지는 우리 당과 우리 군, 그리고 우리나라 각 민족 인민이 공인하는 숭고한 위망을 지닌 탁월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정치가·군사가·외교가이자, 오랜 세월 검증된 공산주의 전사이며, 중국 특색 사회주의 위대한 사업의 뛰어난 지도자이자, 당의 제3세대 중앙 지도집단의 핵심이며, ‘세 가지 대표’ 중요사상의 주요 창립자.


 

2.

 

주룽지의 별세 5일 후인 8월 17일 중국공산당은 장쩌민 탄생 100주년 대회를 개최하여 생전의 업적을 기렸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중국의 개혁 개방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시작했던 개혁·개방정책을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제를 책임졌던 인물이 주룽지였다. 장쩌민 이후 후진타오가 최고위직을 승계했지만, 후진타오는 임기 내내 장쩌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장쩌민과 주룽지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대표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중국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주역이었다. 장쩌민은 1992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중국의 공식 경제 체제로 선언하여 톈안먼 사건 이후 주춤했던 개혁개방의 동력을 재생시켰다. 3개 대표 중요사상(三个代表重要思想)을 만들어 자본가와 민간 기업인의 당 가입을 허용하는 등 지도 이념을 유연하게 확장하고 자본주의적 요소를 적극 끌어들였다. 중국이 지금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을 국가적 차원에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3개 대표 사상의 영향이 크다.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 발전 요구를 대표해야 한다”는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장쩌민은 임기 중인 1997년 홍콩 반환, 1999년 마카오 반환을 이끌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 등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중국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사진 1. 장쩌민과 주룽지

 

 

주룽지는 리펑(李鹏) 총리 시절부터 부총리로서 경제를 책임졌다. 그는 1990년대 초 과열된 고물가를 잡는 긴축 정책을 성공시켰고, 국유기업 개혁과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실업에 직면한 수많은 사람의 원성을 듣기도 하였다. 그의 업적 중 하나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완수한 것이었다. 그는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주도하며 중국을 ‘세계의 공장’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으로 안착시켰다. 또한 개혁·개방으로 인해 발생한 과도한 지방분권을 교정하기 위해 금융과 세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세수 배분을 정비한 '분세제(分稅制)' 개혁은 중앙정부의 재정 통제력을 대폭 강화했고, 중앙이 효과적으로 정책 주도성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빛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동반했다. 자본주의 요소를 대거 도입하고 세계 경제 체제에 본격적으로 통합한 것은 경제의 양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민간 기업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고, 국유기업을 구조 조정하여 핵심 국유기업만 남기고 나머지는 민영화한 것도 민간기업의 활력을 발산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그러나 환경 파괴 등 지속적인 성장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 덩샤오핑이 제기한 선부론(先富论)의 영향이 지속되어 불평등이 확대되었다. 정치적 측면에서도 집단지도체제는 파벌 간의 견제와 균형을 만들어냈지만, 시급한 개혁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추진되지 않는 경색 국면을 만들기도 하였다. 더불어 파벌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부패가 만연한 상황을 타개하기 어려웠다.

 

시진핑은 집권 초기부터 개혁·개방의 부정적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과감한 부패 척결을 위해 집단지도체제보다는 권력 집중을 추진했으며, 중앙집권적인 당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경제도 국유기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고, 공산당의 통제 계속 유지하기 위해 민영기업과 빅테크 기업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민영기업 내에 당 조직을 설치하고, 알리바바와 같이 급속히 성장하는 민영기업을 통제하는 조치들을 취하였다. 또한,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질적 성장을 위한 첨단기술과 첨단산업의 발전을 추진했다. 분배와 양극화 해소를 위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빈곤 탈피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전 시기와 가장 큰 차이점은 국제정세의 변화였다. 중국의 국력 신장으로 중국은 G2 국가로 지칭됐으며, 이에 따라 패권국 미국의 집중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진핑은 이전 개혁·개방시기와 자신의 통치 시기를 구분하여 ‘시진핑 신시대’로 명명하였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역사시기를 개혁·개방의 시기라고 명명하는 것은 별 이의가 없다. 그러나 현재를 시진핑 신시대로 명명하는 것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통치자의 이름이 붙은 신시대는 그 특징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 시기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구분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특징을 추출하고 적절한 이름을 붙일 것인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한다.

 

2026년 8월, 중국 지도부는 다큐멘터리 방영, 기념주화 발행, 대형 학술·기념 행사 등을 통해 장쩌민 탄생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렸다. 이는 공산당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조치로 보인다. 당의 역사적 정통성이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을 거쳐 시진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재확인하면서 내부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중국의 비약적 성장’을 이끈 장쩌민·주룽지 시대의 성과를 기리는 것은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초래하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현 지도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진핑은 과거 성과를 현재 정책의 정당성으로 흡수하고 선대 지도자들이 남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진핑 중심의 강력한 지도력’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로 연결 짓기 위해 노력한다. 개혁·개방 시기의 부정적 요소를 치유하고 중국 사회가 더 발전할지 여부는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구자선 _ 중국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pbs.twimg.com/media/HBO9fl6bAAAS0_m.jpg (AI를 사용하여 이 사진의 해상도를 높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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