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화교 기공(機工) 역사 기억의 공간, 그 이질성과 공통성 _ 리페이
2025년 1월 24일 오후, 중국학술원 싱가포르·말레이시아 화교화인 조사팀은 이번 현지조사 계획의 마지막 조사 현장인 쿠알라룸푸르 도심 지역 화인 공동 묘역에 소재한 ‘화교 기공1) 귀국 항전 순난 기념비(華僑機工歸國抗戰殉難紀念碑)’를 방문했다.
이 기념비는 원래 1947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쟁 기간 동안 동남아 화교 항일 단체이자 동남아 화교 출신 기공의 귀국을 주도했던 ‘남양화교주진조국난민위원회(南洋華僑籌賑祖國難民委員會)’가 건립한 것이었다. 이후 현지 화인 사회는 이 기념비를 기반으로 기념벽과 기념관을 추가로 건설했다.
기념벽에는 화교 기공 3,20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기념관에는 화교 기공과 관련된 사진 자료, 실물 자료, 그리고 일부 기공들의 생애와 행적이 비교적 간단히 전시되어 있다.

사진 1. 쿠알라룸푸르 화교 기공 귀국 항전 순난 기념비
사진 2. 증축된 부속 기념관에 전시된 한 화교 기공의 약력 및 생애
사진 3. 증축된 기념벽에 새겨진 기공 명단
기념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기 ‘인증샷 명소’인 톈허우궁(天后宫)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이 기념비는 커다란 공동 묘역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매우 한적했다. 그랩을 호출해도 배차가 쉽지 않아 10여 분을 허비한 끝에 겨우 차량을 잡을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기념비 옆의 기념관마저 오후 4시 30분에 이미 영업을 종료하고 문을 닫은 상태였다.
기념비는 빽빽하게 들어선 말레이시아 화인 조상들의 묘비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조사팀 일행을 제외하면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자기 영역에 불청객이 침입한 데 분노한 떠돌이 개들이 계속해서 짖어대는 소리만이 주변의 적막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쿠알라룸푸르의 화교 기공 항일 순난 기념비가 보여 주는 한적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중국 대륙 중심의 시각에서 ‘남양 화교 기공(南僑機工)’이라 불리는 이 특수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한 화교·화인 집단은 오늘날 중국 대륙에서 매우 높은 빈도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해외 화교·화인 연구의 한 부분을 이루는 학술 영역뿐만 아니라, 애국 통일전선과 같은 정치 담론의 영역, 나아가 일부 대중 문예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2)
사실 남양 화교 기공(南僑機工)은 해외 화교·화인 출신이라는 배경과 더불어,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의 지휘 아래 중국–버마–인도 전선(中緬印戰場)에 주로 참여했다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전후 중국 대륙에 남게 된 많은 남양 화교 기공과 그 후손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여러 차례의 정치 운동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겪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1980년대 초 개혁개방과 함께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지면서 남양 화교 기공 집단에 대한 기억은 다시 ‘애국 화교·화인’과 ‘항일 전민족 통일전선’의 대표적 상징으로 빠르게 재구성됐다. 이는 당시 개혁개방 초기 해외 화교·화인 자본을 도입하려는 정치·경제적 필요와 이데올로기 환경의 변화에 부응한 것이었다.
1989년에는 남양 화교 기공들이 귀국한 뒤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던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 중국 대륙 최초의 남양 화교 기공 기념비가 건립됐다. 이후 남양 화교 기공에 대한 학술 연구 역시 광범위하게 지원되고 동원되었으며, 2018년에는 다양한 연구를 통해 수집·정리·분석된 남양 화교 기공 관련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등재)’으로 등재되기도 했다.3)
그렇다면 중국 대륙에서 남양 화교 기공(南僑機工)이 이처럼 높은 수준으로 기념되고 기억되고 있다면, 이 집단을 기념하는 물리적 공간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화교 기공 항일 순난 기념비가 보여 주는 한적한 분위기와 비교할 때 훨씬 더 활기를 띠고 있을까? 또한, 남양 화교 기공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주요 정치적 담론 혹은 이데올로기를 구현해야 하는 이러한 공간은, 말레이시아 화교 사회가 자발적으로 형성한 기억의 공간과 어떠한 차이를 보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필자는 춘제(春節)을 맞아 중국 내 친지를 방문하는 길에 쿤밍시 우화구(五華區)에 위치한 ‘남양 화교 기공 역사문화기념관’을 찾아가 보았다.
중국 대륙 당국이 남양 화교 기공을 기념하는 데 있어 매우 높은 수준의 관심과 강조를 보여 왔기 때문에, 필자는 이 기념관이 상당한 규모의 독립 건물이거나, 최소한 관련 당정 기관 혹은 연구기관 건물에 부속된 시설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기념관은 우화구의 한 사구(社區)의 서비스센터에 부속된 시설에 불과했다. 비록 이러한 사구가 실질적으로는 동사무소와 비슷한 가장 말단의 행정 단위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사구는 중국의 공식 행정 체계에 속하지 않으며, 단지 기층의 주민 자치 조직에 해당한다.
또한 필자가 도착했을 때는 분명 기념관의 개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념관의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고 연락을 위한 전화번호 하나만 남겨져 있었다. 필자는 기념관 옆에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고, 그곳이 바로 사구 서비스센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 춘제 연휴가 가까운 시기였기 때문에, 근무 중인 직원은 단지 두 명뿐이었다. 필자가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한 직원이 비교적 친절하게 기념관 담당자에게 연락해 문을 열어 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사진 4. 기념관 1층 로비에서 전시된 당시 남양 화교 기공 수송대가 버마 로드에서 수송 작전을 펼친 모습을 묘사하는 예술작품.
사진 5. 윈난성의 버마 로드 일부 구간은 현대적인 지방도로로 개조되었지만, 도로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사진은 2025년 9월 윈난성 지방도로에서 발생한 작은 규모의 산사태 장면.
마침 전화를 걸던 순간, 기념관의 책임자가 마침 전동자전거를 타고 사구 서비스센터로 돌아왔다. 그가 다른 직원들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니, 이 책임자 역시 사구의 직원이거나 자원봉사자로 보였으며, 단지 기념관의 책임자와 해설사를 겸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책임자는 필자를 위해 기념관의 문을 열어 주었고, 이어서 기념관의 전시 구성과 진열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념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1층 전시 구역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3,000여 명의 남양 화교 기공 명단이 한 면의 벽 전체를 채우는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이는 쿠알라룸푸르의 기념비 주변에 새로 조성된 기념벽에 새겨진 화교 기공 명단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1980년대 이후 진행된 남양 화교 기공 관련 기록물 연구의 성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기념관이 위치한 사구 서비스센터 건물은 사합원(四合院)과 유사한 구조의 오래된 저층 건물이기 때문에, 1층 전시 구역의 기념벽 역시 사구 서비스센터 건물 뒤뜰의 담장을 활용하여 설치되어 있다. 기념벽 외에도 뒤뜰의 여러 담장에는 남양 화교 기공과 관련된 사진 자료와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각각에 대해 관련 설명문이 함께 부착되어 있다.
다만 전시 공간이 사구 서비스센터의 뒤뜰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기 때문에, 1층 전시 구역에는 전시 주제와 무관한 물건들도 눈에 띈다. 예컨대 직원들의 전동자전거가 기념벽 아래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책임자의 안내에 따라 필자는 기념벽 옆의 작은 계단을 통해 기념관 2층 전시 구역으로 올라갔다. 건물 구조상, 2층 전시 구역은 실제로 마당 안쪽에 있는 별채의 2층에 위치해 있었으며, 사구 서비스센터가 있는 2층 공간과는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2층 전시 구역은 각각 약 10㎡ 정도 크기의 작은 방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바깥쪽 방에서는 남양 화교 기공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과 전개 과정을 전시하고 있으며, 안쪽 방에는 이 기념관의 특별 소장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자료들은 은퇴 후 이 사구에 거주했던 일부 남양 화교 기공 생존자들이 남긴 개인 기록과 자료들이다.

사진 6. 기념관 1층 전시 구역에 전시된 기공 명단
사진 7. 기념관 2층 전시실에 전시된 사라왁 기공 귀국 복무 팀의 깃발
사진 8. 특별 전시실에 전시된 기공 개인 기록물
책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구는 윈난성 당위원회와 정부 기관의 퇴직 인사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윈난성에 정착한 남양 화교 기공 생존자들 역시 은퇴 이후 우대 조치의 일환으로 이 사구에 거주하도록 배치된 경우가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고령이었던 남양 화교 기공 생존자는 2020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 기념관 역시 이 사구 서비스센터를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사구의 외벽에는 ‘남양 화교 기공 역사문화 사구(南僑機工歷史文化社區)’라는 표어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를 쓴 인물이 바로 향년 102세로 별세한 그 마지막 생존자이다.
기념관에 전시된 개인 기록 자료에는 한 개인의 출신 배경, 학력, 경력, 정치적 이력 등 중요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정당 가입 신청, 심사, 그리고 정식 당원으로 승인되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생성된 각종 자료와 정보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기념관에 공개 전시된 몇몇 화교 기공의 개인 기록 자료는, 이들이 전쟁을 겪은 이후 중국 대륙에 정착하여 중국 공민이 되는 과정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화교로서의 해외 경험과 국민당이 주도한 전쟁에 참여했던 경험이 그들이 다시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쿠칭(Kuching, 古晉) 출신의 한 화교 기공이 1950년대 말 중국공산당 기층 조직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가 개인 기록의 일부로 전시되어 있다. 이 입당 신청서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 이력과 경력을 매우 상세하게 해명하도록 요구받았으며, 각 항목의 경력마다 해당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명인을 반드시 함께 기재하도록 요구받았다. 그의 자필 기록 자료에 따르면, 그가 서술한 개인 이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 1. 한 쿠칭 출신 화교 기공 입당 서류에 나온 개인 이력에 대한 수기 기록물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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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지역 및 부처 |
직업 |
증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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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933 |
말라야 사라왁 쿠칭에서 부친과 함께 집에서 제동 기술 학습 |
가내 제동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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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939 |
사라왁 쿠칭 복건학교 재학, 이후 쿠칭 세인트 토머스 학교 재학 |
학생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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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 |
사라왁 쿠칭에서 화교 귀국 복무단 지원 후 귀국, 서남운수대 제9대대 제26중대 |
운전반장 |
XXX,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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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1 |
저팡(遮放) 화교 선봉 자동차 운수대 제1대대 |
운전사 |
XXX,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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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2 |
버마 화생(華生) 자동차 운수회사, 양곤 화교 긴급 운송대 |
운전사 |
XXX,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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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3 |
바오산(保山)에서 일본군 폭격 당한 후 샤관(下關) 쯔윈(紫雲) 거주 및 잡화 노점, 이후 바오산 쓰파이루(四牌路) 쭈이셴쥐(醉仙居) 식당 / 왕관툰(王官屯) 신윈(新雲) 제6의료대 |
생계 활동 / 운전사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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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944 |
바오산 비행장 다수툰(大樹屯) 미제(美帝) AAF 부대 |
취사병 |
XXX,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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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944 |
바오산–룽링(龍陵) 다바(大壩) 비행장 미제 자동차 수리소 MTS 부대 |
수리 및 통역 |
XXX,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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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45 |
바오산 잡화 노점, 화교 동학회 주임XXX과 함께 쿤밍 이동 |
생계 활동 / 차량 운송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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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6 |
바오산 샤오베이먼(小北門) 외의 독립지부 |
운전사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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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47 |
버마 양곤에서 수입 자동차를 쿤밍까지 운송 |
운전사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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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948 |
바오산 정양남로(正陽南路) 잡화 노점 |
생계 활동 |
XXX,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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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49 |
바오산 루장(路江) 신청(新城) 초등학교 |
음악·체육 교사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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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51 |
바오산 쓰파이루 담배 노점, 완딩(畹町) 차량 운송 |
운전사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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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952 |
쿤밍 인민정부 화교사무처 소개로 운전면허 시험 |
시험 합격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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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954 |
바오산 노점상 수리조(修理組) 참여 |
수공업자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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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1956 |
바오산 |
임시 노동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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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07- |
바오산현 인민정부 소개로 지방 국영 농기구 공장 노동 |
금속공 |
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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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
스뎬현(施甸縣) 훙광구(紅光區) 야오완(姚灣) 도로관리소로 발령 |
도로 유지관리 |
XXX |
바로 이러한 방식, 즉 자신의 과거 이력을 하나하나 상세히 진술하면서 정치적 반성(예컨대 미군 부대의 복무 경력 등)을 통해 중국 대륙에 남아 정착한 화교 기공들은 엄격한 신원 확인과 충성도 검증을 받았다. 정치운동이 빈번했던 시기에는 이러한 심사와 검증이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적지 않은 화교 기공들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거나,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했다. 기념관 책임자에 따르면, 당시 입당 신청서를 제출했던 이 화교 기공 역시 예상대로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으며, 그의 입당 신청은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승인됐다고 한다.
이 기념관은 화교 기공 개인의 기록 자료를 전시하는 방식을 통해 기공이라는 집단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거시적 역사 흐름 속에서 살아간 일반인들의 운명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 결과, 화교 기공 집단에 대한 기억은 주류 정치 담론의 틀에만 한정되지 않고 개인 생애사의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동시에 기공들이 말년에 집단 거주했던 사구를 기억의 공간으로 선택하고, 더 나아가 기공의 입당 과정에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기념관의 핵심 내러티브로 구성한 점은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은 기공들이 결국 지방사회와 집권당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주류적 정치 담론과 서사와도 교묘하게 부합하고 있다.
쿤밍에 위치한 이 기념관은 쿠알라룸푸르의 기념비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기념비적 건축물이 지니는 장엄한 상징성이나 아우라를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체계적인 관리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방문객에게 다소 실망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기념관이나 기념비 건립에 따르는 객관적 조건, 특히 재정적 여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이는 두 기억 공간이 재구성하고자 하는 비슷한 가치와 이념과도 관련되어 있다.
즉, 화교 기공은 항일 영웅으로서 역사 속에서 기억되어야 할 인물들인 동시에,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평범한 지역사회 구성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화교’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뿌리를 잃고 부유(浮游)하는 존재, 즉 디아스포라적인 타자로 기억되기보다는, 지역사회 속에 정착한 보통 사람들로서 기억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화교 기공을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기억하는 방식에서는, 쿠알라룸푸르와 쿤밍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포착된다.
쿠알라룸푸르의 화인 사회는 대대로 조상을 매장해 온 공동 묘역을 기억의 공간으로 삼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념비를 광둥(廣東)과 푸젠(福建) 두 방언 집단이 각각 관리하는 묘역의 경계 지점에 세웠다. 이는 화교 기공 집단을 당시 말라야·말레이시아 화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위치시키려는 의도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 상황 속에서 말라야·말레이시아 화인 사회가 점차 방언 방회(幇會)의 장벽을 깨고 내부적 단결을 이룬 흔적이다. 동시에 ‘말라야인/말레이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역사적 전환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공간적 장치이기도 하다.
반면 쿤밍의 경우에는 중국 대륙에 남아 있던 화교 기공들이 어떻게 ‘교민’에서 다시 ‘공민’으로, 나아가 공산당 당원으로 재편입되어 갔는가 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한편 일본이 말라야를 침략했을 당시 화인과 말레이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 화인 주도의 말라야 공산당의 유격 활동과 긴급사태 선포, 그리고 전후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독립 과정에서 나타난 말레이인과 화인 사이의 종족 갈등을 고려할 때, 현대 말레이시아 화인 사회는 항일이나 중국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는 말레이시아 주류 정치권이 화인의 충성도에 대해 회의(懷疑)적으로 생각하거나 화인이 친중·친공 세력으로 의심을 받을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인 공동 묘역의 중심부와 같은 비교적 은밀하고 접근이 쉽지 않은 공간을 선택하여, 항일과 중국과의 연관성이 매우 깊은 화교 기공 집단을 기념한 것 역시 자국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선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쿤밍의 경우에는 중국의 주류 정치 담론이 기공 집단을 대거 기념하는 거시적 배경 속에서, 사구 수준의 비교적 조용하고 부드러운 기억과 전시 방식을 통해 화교 기공을 보통 공민이자 사구 구성원으로서 기억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역시 주류 정치 담론에 대한 하나의 절충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리페이 _ 국립인천대학교 중국화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자료
1) 1938년~39년 사이, 해상 운수 통로가 막힌 충칭 국민정부(重慶國民政府)가 중국 남서부와 당시 영국령 버마를 잇는 도로공사를 시작했다. 1940년 일제가 프랑스령 베트남을 점령한 이후, 나중에 버마 로드(Buram Road, 滇緬公路)로 널리 알려진 이 간이도로는 유일한 운수 통로가 됐다. 험한 산지에 건설된 이 간이도로에 군용 트럭의 운전과 정비 인력이 부족해지자, 충칭 국민정부는 동남아 화교 출신 거상인 탄카키(Tan Kah Kee, 陳嘉庚)를 통해 당시 싱가포르, 말라야, 사라왁, 사바, 태국, 버마 등 지역의 화교 기술 인력을 모집하여 귀국시켜 중국 남서부 전선의 운수 작전에 투입했다. 따라서 이들은 동남아 화교 출신 기술 노동자이면서도 2차 세계대전의 중국-버마-인도 전선에 참전한 수송 부대원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이 있었다.
2) 남양화교기공, 또는 남교기공에 대한 국내 연구는 김종호(2024, 「화교 기술공이 경험한 전쟁, 냉전, 국가-남교기공 천방싱의 생애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101), 173쪽~203쪽.)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이 논문은 필자가 소개할 쿤밍 남양 화교 기공 기념관의 사례와 유사하게, 개인 생애사적 관점으로 이러한 중국 정부 차원의 기억과 기념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3) UNESCO MOWCAP, 2018, “The Archives of Nanyang Volunteer Drivers and Mechanics (Nanqiao Jigong)”, https://www.mowcapunesco.org/register/the-archives-of-nanyang-volunteer-drivers-and-mechanics/, 검색일: 2026.03.11.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2, 4, 5, 6, 7, 8. 필자 현장 촬영,
사진 3. 이정희 교수 현장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