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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 세 수로 읽는 춘추시대 위선공(衛宣公)과 그 후손들 _ 이강범

Vol.184/2026.01
관행 톡톡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5-12-3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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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패망 군주 이야기, 그 첫 번째로 춘추 시기, 위(衛)나라의 선공(宣公) 이야기부터 해보기로 한다. 그는 『논어』 「위령공」편에서 공자가 만나는 위령공 보다 13대 위의 군주이니, 공자보다 약 200여 년 전 사람이다.

 

선공의 부친은 12대 군주 위장공(衛莊公)으로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군주에 오른다. 13대 위환공(衛桓公), 14대 위 전폐공(前廢公), 이어서 15대 군주로 오른 이가 바로 선공이다. 이들 네 부자는 골육간의 불화와 살해, 이해하기 힘든 불륜, 외적의 침입과 패전, 그리고 거의 망국에 몰렸다가 다시 기사회생 등, 막장에서 나름의 해피엔딩까지 골고루 보여주고 있다. 위선공은 엄밀히 말해 패망 군주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행한 패륜이 이후 위나라를 거의 패망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패망의 범주에 넣어서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위선공은 아버지 장공이 세상을 떠나기 15년 전부터 아버지의 첩실, 이강(夷姜)을 ‘증(烝)’하게 되는데, ‘증’이란 아버지의 여인과 사통한 것을 가리킨다. 자신이 등극할 때까지 시간 여유가 있어서 그랬는지, 그동안 서모가 되는 이강 사이에서 급(伋)과 검모(黔牟), 소백(昭伯) 등 아들 셋을 낳았다. 이들 삼 형제는 각기 중요한 역할을 하니 잠시 눈여겨 봐두시기 바란다.

 

(1) 며느리를 아내로, 그리고 〈신대(新臺)〉시

그렇게 시간이 흘러 즉위한 지 18년째 되던 해, ‘사건’이 터진다. 『사기』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에는 그 경과가 서술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큰아들 급이 자라 청소년기가 되자, 당연히 태자의 혼인 대사를 논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신부를 이웃 강대국인 제(齊)나라에서 구해오기로 하였다. 신부가 와서 혼례를 치르고 정식 부부가 되어, 아직 ‘입실(入室)’도 하기 전에 시아버지인 선공이 며느리를 보고 반해 버렸다. 혹은 며느리가 예쁘다는 말만 듣고, 강변에 누각을 새로 짓고 며느리를 맞이하였다고도 한다. 설은 많지만, 시아버지 될 사람이 며느리를 아내로 맞아들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과정을 보고 역겹게 여긴 위나라 백성이 노래한 시가『시경』에 남아 있다. 〈신대(新臺)〉라는 제목의 이 시는 젊고 아리따운 아들의 여인을 탐하는 늙은 선공의 작태를 노골적으로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신대〉는 백성들의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그려낸 명시로, 또한 ‘이시증사(以詩證史)’, 즉 시로서 당시 역사를 증명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새 누각은 선명하고, 황하에는 강물이 가득하네. 아름다운 짝을 구했는데, 두꺼비같이 추한 자를 만났네.

새 누각은 우뚝하고, 황하의 강물은 끝이 없네. 아름다운 짝을 구했는데, 두꺼비 같은 자 죽지도 않네.

어망을 놓았더니 두꺼비가 걸렸네. 아름다운 짝을 구했는데, 이런 두꺼비 같은 놈이 걸렸네.

 

이 시는 군주인 선공을 늙고 추한 두꺼비 같은 노인네로 묘사하고 있는데, 비유가 우아하지 않지만, 당시 백성의 마음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다. 소개팅이나 맞선이 망가지면, 우아하게 이 시를 응용해 보시기 바란다.

 

아무튼 선공이 이 시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들었다고 해도 흔들릴 사람이 아니다. 전에는 아버지의 여인을 탐하여 세 아들을 낳더니, 이번엔 아들의 여인을 탐하고 있다. 그리곤 망설일 것 없이 자신이 차지해 버리고 듬뿍 사랑을 주었으니, 그녀가 바로 ‘선강(宣姜)’이다.

 

 

그림1. 위선공과 선강, 그리고 이강

 

 

(2) 선강의 등장

그리고 아들에게는 다른 혼처를 마련해 주었다. 급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기록에 없다. 하지만 훗날 급의 태도로 보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 지은 누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스럼없이 자신의 품으로 들어온 ‘며느리 새 신부’와 선공은 또 ‘수(壽)’와 ‘삭(朔)’ 두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여인이지만 첫사랑이 되었던 이강(夷姜)은 선공의 사랑이 선강으로 옮겨가자 목을 매어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다. 빈자리가 된 정실부인의 자리에 오른 선강은 어느덧 제법 자란 둘째 아들 삭과 함께 태자인 급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위나라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신랑감이었지만, 어느덧 법적으로 아들이자 라이벌이 되어버린 태자를 해하려 하였으니 정말 무서운 여인이다.

 

늙은 군주의 젊은 아내 입장에서 아들이 어린 데다 이미 정한 태자까지 있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아들을 계승자로 올리기 위해 힘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력을 향한 욕심도 작용하겠지만, 그보다는 손 놓고 있다가 자신과 아들, 둘 다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살기 위한 본능으로 봐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들 모자는 성공한다. 선공이 태자 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3) 형제의 우애, 함께 죽음으로…

선공은 왜 큰아들을 싫어했는가? 간단하다. 자신이 아들의 여자를 뺏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괜히 속으로 찔려 아들 보기 부끄러운 민망함이 분노로 터진 것이다. 사랑하는 젊은 아내와 막내아들의 참언을 들은 선공은 격노했다. 이성적이지 않은 군주가 격노하면 늘 피가 흘러야 마감된다. 곧 아들에게 임무를 하나 맡겼다. 이 흰 깃발을 들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거라. 제나라는 우리의 후견자이자 사돈 나라이니 중요한 임무니라.

 

그리곤 다시 위나라와 제나라 사이의 국경, 즉 지금의 산동의 강도 떼들에게도 밀명을 내렸다. 대기하고 있다가 흰 깃발을 든 사내가 오면 즉시 죽이도록 하라…… 그런데 아버지의 음모를 삭의 형인 수(壽)가 알았다. 선강이 낳은 두 아들이지만, 동생인 삭과는 달리 수는 큰 형님을 많이 따랐다. 착한 동생은 급히 큰 형님에게 알렸다. “형님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음모입니다.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 큰형은 대답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목숨을 구하는 짓은 할 수 없구나.” 기어코 형님이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안 동생은 자신이 깃발을 들고 먼저 출발하였다. 국경에 도착하자 도둑 떼들이 보고는 바로 죽였다. 동생이 죽은 것을 안 큰형은 그대로 출발했다. 국경에 도착한 큰 형은 말했다. “그대들이 죽여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도둑 떼는 감동을 하였을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름 프로들이다. “아이고, 그러셨어요?” 도둑들은 즉시 급도 죽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선공은 ‘공로’가 큰 막내 삭을 태자로 삼았다. 이렇게 선공이 금수만도 못한 짓을 한 해가 재위 18년째였으니, 그가 죽기(BC700년) 1년 전이었다. 선강의 소원대로 막내 삭이 제후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16대 혜공(惠公)이다.

 

선공의 행적에서 보듯이 젊어서부터 비뚤어진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재위하는 동안,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정도의 실정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위나라의 위기는 그가 뿌린 비윤리적 씨앗이 점차 자라나 국가의 존망까지 뒤흔들게 된 데 있었다.

 

(4) 혜공의 도피와 복귀

위에서 보듯 어진 성품으로 기대를 모았던 큰 형님 급(伋)과 막내 형인 수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제후에 오른 혜공에 대해 궁중 안 사람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결국 혜공 4년(BC696)에 조력자 혹은 사부의 역할을 하던 공자(公子)들이 공모하여 혜공을 공격하였다. 혜공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머니의 나라 제나라로 도망가고, 위 나라 사람들은 장자 급(伋)의 동생인 검모(黔牟)를 제후로 모시게 된다. 그러나 검모가 즉위한 지 8년이 지난 BC688년, 제나라가 갑자기 다른 제후와 연합하여 위나라를 치고는, 자신이 보호하고 있던 혜공을 다시 즉위시켰다. 그 직전에 검모는 천자국인 주(周)나라로 도주하였고….

 

검모의 생모 이강(夷姜)도 제나라 여자이고, 혜공의 생모 선강(宣姜)도 제나라 출신이지만, 제나라 희공(僖公)의 딸인 선강의 지위가 훨씬 높았다. 그리고 선강의 아들 혜공을 다시 복귀시키는 것이 검모보다는 이용가치도 높고, 말도 더 잘 들을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렸을 것이다.

 

혜공은 지울 수 없는 원죄에도 불구하고 쫓겨난 기간까지 합쳐 31년 동안 군주 자리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거리낌 없이 살았다. 그러나 혜공의 아들 의공(懿公, 이름은 赤적)이 계승함으로써 위나라에는 본격적인 막장극이 펼쳐지게 된다.

 

(5) 학을 사랑한 의공(懿公)

의공은 즉위하자마자 가장 사랑하는 것에 온갖 정성을 들였다. 여인도 신하도 아니고, 백성은 더더욱 아니다. 바로 학(鶴)이다. 날아다니는 철새 말이다. 물론 키도 크고 우아한 자태가 감탄을 자아내는 멋진 새이지만, 광기에 가까운 변태적인 사랑을 쏟을 만한 대상은 아니다. 역대 군주들의 괴이한 취미를 적지 않게 보았지만, 의공 같은 희한한 취미를 가진 군주는 드물다. 그는 학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벼슬까지 내렸고, 이로 인해 대부들이 타는 수레인 헌(軒)을 타고 다니는 녀석들도 있었다. 일설에는 학이 끄는 수레를 즐겨 타고 다녔다고도 한다. 의공은 음악을 좋아하였고, 각종 음란행위도 빠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사치스러웠다.

 

그렇게 즐기면서 살았는데, 재위 9년째인 BC660년, 적인(狄人)이 쳐들어 왔다. 침략을 받았으니 맞서 싸워야 할 터, 그런데 출전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말했다. “학에게 시키시지요. 학들은 벼슬도 있고 녹봉도 받는데, 어찌 우리가 나가서 싸우겠습니까?” 결국 의공은 직접 나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두 신하에게 국가의 일을 일임하고, 비장하게 출전하여 형택(熒澤)이라는 곳에서 싸웠으나 대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라 사람들은 그리 슬퍼하지 않았다. 그가 쌓은 업보 때문이리라.

 

이전부터 불쌍하게 여기던 급(伋)은 아들이 없고, 그 동생 검모(黔牟) 역시 후사가 없는지라, 검모의 동생인 소백(昭伯)이 낳은 아들 신(申)을 즉위시켰으니, 이가 바로 대공(戴公)이다.

 

(6) 엉켜버린 족보, 서모와의 결혼

그런데 소백이 낳은 아들 신이라… 처음 나오는 인물이다. 이제부터 윗대 선공이 저지른 패륜에서 시작하여 가계도가 엉망이 되면서 읽는 사람도 매우 헷갈리기 시작한다. 즉 선공의 막내아들 혜공이 즉위하면서부터, 후견 국가인 제나라는 또 다른 대비책을 세우고 있었다. 즉 선공의 며느릿감이었으나 그의 아내가 되어 혜공을 낳은 선강은 남편이 늙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이 어린 혜공이 미덥지 않았던 제나라에서는 다시 소백에게 선강을 ‘증(烝)’, 그러니까 서모를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이런 황당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강요한 당사자로 선강의 친정아버지 제희공(齊僖公)이 지목되고 있다.

 

소백 입장에서도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자기 큰형 급(伋)에게 시집와서 큰 형수가 될 뻔한 사람이 갑자기 서모(庶母)가 되었는데, 이제는 과부가 된 서모와 또 부부가 되라는 말이다. 선강으로서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이다. 막내 시동생이 될 사람이 졸지에 법적인 아들이 되었다가, 지금은 그 법적인 아들의 아내가 되라고 친정아버지가 강요한다. 물론 소백은 가당치도 않다고 거부하였으나, 제나라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친정아버지의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은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지게 된다. 결국 소백은 선강과 결혼하여 다섯 남매를 줄줄이 낳았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에 대해 위나라 백성인들 마음이 편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강을 인륜을 저버린 채 가리지 않고 권력가의 품에 뛰어드는 음란한 여인으로 비난하는 것은 억울해 보인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종의 정치적 희생양이라고 변호해 주고 싶은 것은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을 막론하고 국제간의 역학 관계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7) 두 부부의 5남매

아무튼, 이런 백성의 풍자와 힐난을 뒤로하고, 그들 5남매는 이후 위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중흥 군주가 되거나, 중국 문학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기 때문에 남매의 이름은 기억해 둘만 하다. 첫째부터 순서대로 제자(齊子)・대공(戴公, 이름은 申신)・문공(文公, 이름은 燬훼)・송환부인(宋桓夫人)・허목부인(許穆夫人)이다. 두 아들 대공과 문공은 차례대로 군주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세 딸을 보자면, 큰딸은 제나라로 시집갔지만, 별다른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둘째 딸은 송(宋)나라 환공(桓公)에게 시집가서 송환부인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막내딸도 마찬가지로 허(許)나라 목공(穆公)에게 출가하여 허목부인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 본 선공 이후의 가계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럽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선공과 결혼한 선강이 위선공의 아들 소백과 결혼한 선강과 동일 인물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도표를 보시기 바란다.

 

 

 

 

(8) 주변국의 도움과 새로운 건설

위에서 본대로 적인(狄人)의 침범으로 혜공이 전사한 후, 계속된 혼란 속에 나라가 거의 없어질 뻔하였다. 이때 송환부인이 친정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송환공은 전쟁에서 패한 위(衛)의 유민들을 황하(黃河)강 변에서 맞이하여 밤에 황하를 건너 조읍(漕邑)에 일단 자리 잡게 하였다. 이때 송나라는 상당히 강할 때였으므로, 송환공이 위나라를 도와줄 여력이 있는 데다, 송환부인의 역할도 컸을 것이다. 그렇게 정착시킨 위나라 유민의 숫자는 730명에 불과하였으니, 거의 나라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 본래 위나라에 속했던 공읍(共邑)과 등읍(騰邑) 주민 5천 명을 합하여 새롭게 나라를 재건하게 하고, 5남매 중 장남인 대공(戴公)을 즉위시켰다. 하지만 대공은 그해에 바로 사망하였으므로 별다른 역할을 할 틈이 없었다. 그를 이을 후계자는 동생 훼(燬)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훼가 바로 위나라 중흥을 이끄는 문공(文公)이다. 그래서 망국 직전에서 기사회생한 위나라에 비로소 새로운 희망이 돌기 시작했다.

 

『시경』「용풍(鄘風)」에는 이때 위나라 사람들이 문공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도시에서 궁실을 짓는 모습을 노래한 시 〈정지방중(定之方中)〉이 실려 있는데, 당시 분위기를 파악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정성(定星)이 남쪽 하늘 가운데 오니, 초구(楚丘)에서 새 궁을 짓네.

해그림자를 따라 방향을 측정하고, 초구에 살 집을 짓네.

개암나무 밤나무를 심고, 산유자나무・오동나무・가래나무・옻나무를 심어, 금과 슬을 만들 거라네.

옛 조읍(漕邑)에 올라 초구를 바라보고, 초구와 당읍(堂邑)을 바라보고,

산과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뽕나무숲을 내려다본다.

점을 쳐보니 크게 길한지라, 믿을 만한 좋은 곳이로다.

좋은 비가 내렸으니, 마차 몰이에 명한다. 맑은 날 아침 일찍 마차를 몰아, 뽕나무밭에서 쉰다.

저 사람은 정직하고, 마음 씀이 성실하고 깊어 암・수 좋은 말이 삼천 마리나 되었다네.

 

(9) 최초의 여류 시인, 허목부인의 〈재치(載馳)〉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장 애타는 여인이 또 있었으니, 바로 5남매의 막내인 허목(許穆)부인이다. 그녀는 허(許)나라 목공(穆公, BC697-BC656 재위)에게 시집갔는데, 허나라가 너무나 빈약하여 친정을 도와줄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의 작위 제도는 천자와의 친소관계나 공훈에 따라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 등 오작(五爵)으로 나뉘는데, 그중에서 허나라는 문헌상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제5등 ‘남작(男爵)’ 제후국이다. 그러니 허나라의 국세는 여러 면에서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약하다. 목공은 13대 군주로, 41년을 군주로 지냈다.

 

조국의 변고를 들은 허목부인은 하루라도 빨리 친정으로 가서 죽은 오빠 대공(戴公) 영전에 조문도 하고, 새로 제후에 오른 작은 오빠 문공(文公)도 만나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정작 허나라 사람들이 가는 길을 막았다. 그때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읊은 〈재치(載馳)〉라는 제목의 시가『시경』「용풍(鄘風)」에 전한다. BC659년에 지어진 이 시는 시가 역사상 매우 빼어난 시로 꼽힌다. 중국 최초의 여류 시인이 누구인지, 여러 설이 있지만 압도적으로 허목부인을 꼽는다. 이 시는 작자와 연대, 그리고 창작배경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시 중 하나이다. 좀 길지만 모두 옮겨보기로 한다.

 

말을 달리고 또 달려서 돌아가 위후(衛侯)를 위문하리라.

멀고 먼 길 말을 달려 조읍(漕邑)에 이르려 하는데,

허(許)나라 대부(大夫)들이 뒤쫓아 오니 내 마음 근심에 젖네.

나를 좋지 않게 여긴다 해도 곧바로 돌아갈 수 없다네.

그대들이 선량하지 않은 것보다 내가 더 멀리 보지 않는가?

나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해도, 다시 강을 건너 돌아가지 못한다네.

그대들이 선하지 않은 것보다 내가 더 신중하지 않은가?

저 언덕에 올라가 패모(貝母)를 캐노라.

여자가 상념이 많은 것은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그런 것.

허나라 사람들이 나를 허물하니, 유치하고도 어리석구나.

내가 들판을 지나는데, 보리가 무성하다.

큰 나라에 하소연하고 싶지만, 누구와 통하고 누구를 오게 하나?

허나라 대부여, 군자여, 나를 허물하지 말기를.

그대들의 백 가지 생각도 내가 한 번 가는 것만 못하거늘.

 

같은 구절이 반복되면서 한두 글자만 바꾸어 노래하는『시경』의 다른 시보다, 애통한 마음을 그려내는데 효과적인 수사와 비유로 가득하다. 작자가 상상하는 장면으로 전개되는 패모(貝母)를 캔다는 묘사는 절묘하다. 패모는 울결(鬱結), 즉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주는 데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언덕에 올라가 패모라도 캐면 가슴속 맺혀있는 한을 조금이라도 풀릴까 하는 한탄으로 보면 되겠다. 주자(朱子)는 허목부인이 끝내 친정인 위나라에 도착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허나라 대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위나라에 가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10) 숨 막히는 춘추시대 예법

시의 마지막 부분의 “큰 나라에 하소연하고 싶은” 탄식을 보면, 허목부인 처녀 시절의 심경을 헤아려 볼 수 있겠다. 언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언니 나도 제나라로 시집 가고 싶어. 꼭 크고 부자 나라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위나라는 약해서 만약 큰일이 생기면 우리 시댁에서 도와야 하는데, 내가 허나라 같은 약소국에 가면 도와줄 수가 없잖아.” 단순히 소녀의 로망이라기보다는 조국의 현실이 워낙 암담해서 그랬으리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의공은 결국 허나라로 시집 보내기로 결정한다. 허나라에서 보낸 성대한 예물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얘기도 있으니, 나쁘게 말하면 뇌물에 족보상 누이이자 사촌누이를 넘겨버린 셈이다.

 

그런데 허나라 대부가 뛰어와서 못 가게 말린 것도 막무가내 행위는 아니라, 선왕이 정한 예(禮)에 따른 것이다.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범씨(范氏)가 말하였다. ‘선왕이 예(禮)를 만들 적에 부모가 별세해도 친정 나라에 돌아가 문안하지 못하게 함은 의(義)이니, 비록 국가가 멸망하고 군주가 죽더라도 달려가지 못함은 의(義)가 망함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해서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예법이 아닐 수 없다. 다 아는 얘기지만, 노신의 『광인일기』에서 얘기하는 역사책 속 ‘인의 도덕’을 허목부인이 맞닥뜨린 ‘예의(禮義)’와 등치 시켜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노신의 말대로 정신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수양의 덕목인 인의가 오히려 사람을 옥죄는 족쇄로 허목부인을 잡아먹는 괴물로 변한 것이리라.

 

아무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문공의 노력으로 위나라는 730명 남은 나라에서 다시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비록 약소국이긴 하지만, 이때부터 진시황한테 멸망 당할 때까지 450년을 더 유지한다. 이렇게 자기를 낳아준 생모가 한때는 할머니였고, 작은아버지가 나중에 오빠가 되는 어지럽기 짝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다시 할아버지처럼 불륜이나 황음에 빠지지 않고 비교적 정도를 걸어가 조국을 구해내는 것 역시 선공이 뿌린 나쁜 씨앗이 좋은 결과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면 위선공을 지나치게 변호해 주는 말일까?

 

 

【중국의 패망 군주들 1】

이강범 _ 중앙대 명예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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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AI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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