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어린 신랑은 왜? _ 손승희

사진1. 민국시기 어린 신랑과 들러리
혼인 연령은 그 사회가 근대화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지표이다. 현재 중국에서 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는 연령은 남자 22세, 여자 20세 이상이다. 1950년에 반포한 중화인민공화국 『혼인법』에서는 혼인 연령을 남자 20세, 여자 18세 이상으로 규정했었다.
사실 1930년 중화민국 정부도 『민법』 친속편(親屬編)을 공포하여 “남자 18세 미만, 여자 16세 미만은 결혼할 수 없다”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정해진 이 혼인 연령은 이후에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1940년대까지도 보수적인 농촌사회에서는 이른 나이에 혼인하는 조혼(早婚)은 꽤 흔한 관습이었다. 그러나 조혼은 혼인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폐해를 낳았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수립 직후 조혼의 금지를 강력하게 규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혼의 풍습은 왜 행해졌던 것일까?
‘조혼’이라고 하면 어린 신부를 의미하는 동양식(童養媳)을 쉽게 떠올리게 된다. 동양식은 적은 빙금(聘金: 현금)을 받고 어린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식비를 줄이고 극도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이었다. 따라서 빈곤층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유행한 바 있다.1) 그러나 혼인 후 동양식이 겪어야 했던 냉대와 고초는 상당히 비인간적이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동양식은 빈곤이 낳은 기형적인 혼인형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보면 동양식의 비율은 0.5%로 그리 높지 않았다. 특히 푸젠(福建), 타이완(臺灣), 광둥(廣東)성 등 남부 연해지역에서 유행하여 화남지역에서 0.8%의 비율을 보인 반면, 화북지역에서는 0.1%에 불과했다.2) 가난한 것으로 치면 화북농촌도 화남의 빈곤층에 못지않았는데, 무슨 일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두 지역의 자연조건과 사회경제적인 환경이 달랐던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화북농촌에서는 동양식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고,3) 오히려 남자의 조혼이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화북의 조혼상황은 1929-31년 사회학자 차오치밍(喬啓明)이 중국 11성 22개 지역 12,456 가정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수치로도 확인된다. 조사에 의하면, 화북에서 14세 이하의 결혼한 남자가 10.9%인 반면, 화남에서는 1.6%로 나타났다. 여자의 경우에는 화북이 9.4%, 화남이 2.8%였다.4) 남녀를 불문하고 대체로 화남지역에 비해 화북지역의 혼인 연령이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화북농촌에서도 유독 남자의 조혼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당시 화북농촌에서는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화북농촌은 토지가 척박하고 인구밀도가 높아 가난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여아의 탄생은 환영받지 못했다. 따라서 여아가 살해되거나 방치되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여아가 요행히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그 생존 기회는 확실히 남아보다 적었다. 여아의 양육이나 영양 상태가 남아만큼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북농촌에서는 화남에 비해 영아를 포함한 여자의 사망률이 높게 나타났다.5)
여자의 높은 사망률은 여자의 부족 사태를 가져왔고, 이는 연쇄적으로 남녀 성비 불균형 현상을 초래했다. 1929-31년 전국 평균 남녀 성비는 109로 나타났다.6) 이는 여자 100명당 남자의 수를 나타낸 것으로, 남자가 9명이 더 많다는 의미이다. 지역에 따라 남녀 성비가 더 높은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1928-29년에 실시된 각 성시 인구조사에서는 하북성이 124.3, 산서성이 134.1을 기록하는 등 높은 성비 불균형 현상을 보였다.7)
남녀 성비 불균형으로 인해 혼인할 여자가 부족해지자 상층의 부유한 가정에서는 좋은 혼인 상대를 보장받기 위해 조혼을 행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혹시 여자의 부족으로 혼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혼인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화북농촌이라 하더라도 모든 계층에서 남자의 조혼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조혼현상은 부유한 계층에서 많이 나타났다. 전통 혼인의 과정에서 신랑집은 신붓집에 빙례(聘禮)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현금을 제공하는 예도 많았기 때문에 조혼하게 되면 신랑 가정에서는 신랑이 어릴 때 현금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조혼은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유한 가정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빈곤한 계층의 남자는 빙례나 빙금을 감당할 수가 없어 성인이 된 지 오래되어도 장가를 가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심지어는 평생 미혼인 상태로 남는 경우도 있었다. 화북농촌에서 “부자는 정혼(訂婚)이 많이 빠르고, 가난한 가정은 정혼이 많이 늦은 것”8)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는 혼인의 양극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부유한 계층에서 관습이 행해지면 중하류 계층에서도 따라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조혼의 관습은 화북지역에서 상당히 넓게 퍼져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스란히 각지의 지방지에 기재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정혼이 가장 빠른 것은 3-4세이고 보통은 10세인데, 부잣집의 정혼이 빠르다,”9) “이르면 6-7세, 늦으면 12-13세에 정혼하고, 20세 이전에 혼인하는 자가 많다,”10) 혹은 15-16세가 되어도 혼인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 부모의 부끄러움”이 되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 심했다는 것이다.11) 이렇듯 남자의 조혼이 유행하다 보니 아내의 나이가 남편보다 6-7세 혹은 7-8세까지 많은 경우가 보통이었다.12) 결과적으로 화북농촌에서는 “10세도 안 된 아동이 20세 전후의 여자와 혼인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13)
혼인의 목적 측면에서 본다면, 부유한 가정에서는 조상에 제사하고 후손에 계승하기 위해 좋은 신부를 얻겠다는 심리가 컸다. 중국 전통 가정의 운영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대를 잇는다는 종조(宗祧)관념이었고, 그것이 곧 혼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중등 이하의 가정에서는 신부를 맞아들이면서 가사를 맡거나 요리할 인력으로도 활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14) 혼인을 통해 가정의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겠다는 현실적인 심리가 컸던 것이다. 따라서 나이 어린 신부보다는 가정에 도움이 될만한 연령의 신부를 맞아들이는 것을 선호했다. 신부의 나이가 15-24세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15) 그런 이유이다.
이상과 같이 화북농촌에서는 뿌리 깊은 종조관념과 경제적인 빈곤으로 초래된 극단적인 남녀 성비 불균형이 남자의 조혼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한편으로는 혼인을 통해 가족의 부양과 현실 생활의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려는 혼인의 합목적성이 조혼을 더 유행하도록 만들었다. 즉 인위적인 행위로 형성된 남녀 성비 불균형과 혼인을 통한 현실적 타협이 비정상적인 혼인형태의 유행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없던 전통시기에 중국인들은 가정을 떠나면 살아갈 방도를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사람들은 각종 혼인형태나 방식을 통해 가정에 편입되었고16), 많은 부분이 혼인을 통해 해결되었다. 조혼도 그 과정에서 형성된 관습이라 할 수 있다.
손승희 _ 중앙대학교 연구전담 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자료
1) 특히 광둥성 객가 사회에서는 동양식을 거쳐 결혼한 비율이 80-90%인 현도 있었다. Arthur P. Wolf and Chieh-shan Huang, Marriage and Adoption in China, 1845-1945,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0, pp.1-15.
2) 喬啓明, 「中國農村人口之結構及其消長」,『東方雜誌』, 32-1(1935), p.28.
3) 화북농촌의 빈곤 가정에서는 어린 신부를 맞아들이게 되면 그에 대한 식비와 양육비가 늘어나는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에 동양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형편이 좋은 가정에서는 동양식이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동양식을 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中國農村慣行調査刊行會編, 『中國農村慣行調査』(5), 岩波書店, 1956, p.488.
4) 喬啓明, 「中國農村人口之結構及其消長」, 『東方雜誌』, 32-1(1935), p.35.
5) 張折桂, 「定縣大王耨村人口調査」, 『社會學界』 5(1931), p96; 李長年, 「女嬰殺害與中國兩性不均問題」, 『東方雜誌』, 32-11(1935), pp.100-101; 喬啓明, 「山西人口問題的分析硏究」(附表), 『社會學刊』, 2-2(1931), p.7, p.10.
6) 喬啓明, 「中國農村人口之結構及其消長」,『東方雜誌』, 32-1(1935), pp.33-34.
7) 謝海澄, 「我國人口的性別分配問題」,『女子月刊』, 3-12(1935), p.5388.
8) 「邯鄲縣志」(1922), 「平山縣志料集」(1932), 「雄縣新志」(1929), 丁世良·趙放主編, 『中國地方志民俗資料匯編』(華北編), 北京圖書館出版社, 1989, p.437, pp.129-130, p.334.
9)『中國農村慣行調査』(5), p.127.
10)『中國農村慣行調査』(1), 1952, p.266.
11) 前南京國民政府司法行政部編,『民事習慣調査報告錄』, 中國政法大學出版社, 2005, p.656.
12)『民事習慣調査報告錄』, p.655.
13) 「梁漱溟山東省政府建議革除早婚陋俗」,『公敎婦女』, 3-4(1936), p.296.
14)『中國農村慣行調査』(1), p.250, p.255, p.266;『中國農村慣行調査』(3), 1955, p.147;『中國農村慣行調査』(4), 1955, p.62, p.65, p.137, p.140;『中國農村慣行調査』(5), p.498; 張折桂, 「華北農村社會的婚姻狀況」, 『社會問題』, 1-2/3(1930), p.122; 張折桂, 「定縣大王耨村人口調査」, 『社會學界』 5(1931), p.99; 吳顧毓, 「鄒平第一年生命統計之分析」, 『鄕村建設半月刊』, 6-1(1936), p.5.
15) 喬啓明, 「中國農村人口之結構及其消長」,『東方雜誌』, 32-1(1935), p.36. 李景漢, 「農村家庭人口統計的分析」,『社會科學』, 2-1(1936), p.96.
16) 빈곤 가정에서는 동양식, 데릴사위(招夫, 招贅), 겹사돈(轉親) 등의 방법으로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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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http://ccwm.china.com.cn/dc/2024-03/26/content_4273729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