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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과 역사 서사의 주인 문제 _ 구자선

Vol.180/2025.09
갯벌로에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5-08-2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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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금 9월 3일 열병식 때문에 분주하다. 9·3열병식의 정식 명칭은 ‘중국 인민 항일전쟁 승리 기념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기념 활동’이다. 우리는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지만 중국은 9월 3일을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종전 조서>를 발표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정식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도 지난 후였다. 9월 3일 도쿄시간으로 9시에 일본 정부 전권대표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와 대본영 전권대표 육군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가 각각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미국 전권대표 맥아더를 비롯한 중국, 영국, 소련,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전권대표도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확인하였다. 당시 중국의 대표는 중화민국 정부의 쉬융창(徐永昌) 장군이었다. 이로써 2차대전이 정식으로 종결되었다. 당시를 기록한 필름을 보면 시게미쓰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한쪽 다리가 의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당시 부상을 입어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이날, 중화민국 정부는 전국에 승리를 선언하고 다음 날(9월 3일)을 승리일로 하여 경축하며 거국적인 휴일로 지정하였다. 현재 중국의 여덟 개 민주당파 중 하나인 ‘구삼학사(九三学社)’는 항전 승리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날 ‘민주과학 좌담회’에서 이름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참고로 유럽과 소련은 기념일을 각각 달리 지정하였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인 5월 8일을 ‘유럽승리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항복문서에 서명한 다음 날을 승리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래서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구소련의 일원) 각국은 지금도 5월 9일을 ‘조국 보위전쟁 승리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다음 해인 1946년 4월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중화민국 정부는 결의의 형식으로 9월 3일을 항전 승리 기념일로 공식확정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변화가 일어난다. 그해 12월 23일 정무원(현재의 국무원)은 8월 15일을 항일전쟁 승리일로 지정했다. 그러다 2년 후인 1951년 8월 13일 정무원은 다시 항일전쟁 승리일을 9월 3일로 확정하는 통지를 발표했다. 2014년 2월에는 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9월 3일을 ‘중국 인민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중국 인민 항일전쟁과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명칭과 약간 다르다. ‘중국 인민 항일전쟁’이라 칭한 것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으로 발발한 중일전쟁뿐만 아니라 2차대전 이전인 1931년 9월 18일 발발한 일본의 만주침략 전쟁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또한 어느 특정한 집단, 특히 국민당 정부만의 대일전쟁이 아니라 전 중국인들이 거국적으로 벌인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국민당 정부의 노력을 희석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을 덧붙인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은 곧 세계 제2차 대전을 가리킨다. 중일 전쟁이 2차대전의 일부라는 것은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2차대전의 주전장은 소련이었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도 소련이었다. 그래서 중일전쟁은 2차대전사에서 뒤로 밀려난 감이 있다. 그래서『중국, 잊혀진 동맹(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이라는 책에서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라나 미터(Rana Mitter)는 오랫동안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항상 미국, 영국, 소련이 이끄는 파시즘과의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아시아 전장에서 중국의 일본에 대한 저지, 견제, 그리고 그로 인한 중대한 희생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서양인들에게 잊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타당하다. 중국이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을 언급하는 것은 중일전쟁에서 중국 인민들의 희생을 부각하고 소홀히 여겨졌던 세계사적 의미를 격상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기념식을 둘러싸고 대만과 중국의 ‘역사 서사의 주인공’ 문제가 발생한다. 공식 명칭이 중화민국인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역사적 서사와 누가 승리의 공을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격렬한 설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인민들의 공을 부각한다고 해도 당시 대일 항전을 주도했던 세력이 중화민국 정부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36년 말 이루어진 2차 국공합작 시기 중국공산당 군대는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재편되어 국민혁명군 소속이 되었다. 당시 팔로군은 총 3개 사단에 병력 5만 명 이하로 시작하였다. 신사군은 그보다 훨씬 적은 약 1만 명 정도였다. 당시 국민당군에 비해 극히 소수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주요 전투를 보더라도 공산당군은 1937년 9월 평형관 전투(平型關戰役)로 일본군 1,000여 명을 사살했고, 1940년 8월 팔로군 20만 명이 참가한 백단대전(百團大戰) 정도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활동은 소규모 게릴라전이었다. 그러나 국민당군이 치른 대규모 전투만 하더라도 쑹후회전(淞滬會戰), 난징사수전(南京攻守), 타이위안회전(太原會戰) 타이얼좡회전(台兒莊會戰), 충칭대공습, 창사회전(長沙會戰), 미얀마전투, 창더회전(常德會戰), 랴오허커우(遼河口)전투 등 공산당군에 비해 압도적이다. 또한 사상자 수도 국민당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46년 말 중화민국 정부는 군인 사상자가 331만 명 이상, 국민 사상자가 842만 명 이상으로 총 1,173만 명에 달한다고 발표하였다. 그중 90% 이상이 중앙군 부대였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은 정통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말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항일전쟁의 성과는 자신들이 계승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민진당이 집권한 대만의 입장은 미묘하다. 중국과의 연계를 단절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9.3 전승 행사에 적극적이지 않다. 다만 중국의 행태에 대해 비판만을 할 뿐이다.

 

대만 대륙위원회 주임 추추이정(邱垂正)은 일본 항복 기념일인 8월 15일에 “중화민국은 공산당에 무기와 장비를 제공했고, 그들을 강화시켜 주었다”. “중화민국이 일본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르는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중국 공산주의 정권은 저항 전쟁을 주도한 세력이 공산당이라고 주장하며 반복적으로 사실을 왜곡해 왔다”라고 비판했다. 대만 대륙위원회 또한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강화하는 것에 70%, 국민당 정부와 상대하는 것에 20%, 일본과의 전투에 10% 역량을 투여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기념식에 대만인들이 참석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또한 전현직 국방, 정보 또는 외교 관련 고위 관리들에 대한 연금 중단과 같은 처벌을 언급하며 중국의 행사 참가를 만류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은 한국과 동북공정 등으로 역사 해석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서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전개되었으니,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현재의 정치적 목적을 투영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다. 9·3 열병식 행사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지정학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중국의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자국의 과거를 미화하며 국력을 과시하는 행사가 된다면, 세계는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거리를 두려고 할 것이다. 많은 희생 위에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제 미국과 패권 경쟁을 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므로 과거 압박과 침략으로 인해 생겨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강대국에 걸맞은 책임을 이행할 시기이다. 전범국과 피해국의 경계를 넘어 평화를 위한 연대를 모색하는 유럽의 전승절을 본받아 동북아의 평화와 연대를 모색하는 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이른 기대일까.

 

 

【중국시사 오딧세이5】

구자선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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