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한일협정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내외 인식 맥락 _ 정규식

사진1. 1965년 6월 22일, 장장 14년에 걸친 한일회담 끝에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올해로 한일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흘렀다. 주지하듯이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은 냉전체제의 한계 속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배상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체결되었고, 강제 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재일조선인 지위 문제, 북한과의 관계 등 여전히 미해결된 여러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따라서 한일협정에 관한 이해는 냉전체제의 구조와 동아시아 지역 정치의 구도 속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1) 하지만 이제까지 국내 학계에서는 실제 당시 동아시아 냉전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중국은 이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또 그러한 인식 형성의 구체적 배경과 맥락은 무엇인지에 관한 연구가 매우 미진했다. 1951년 한일회담이 시작되어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당시의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국가건설과 사회경제 발전의 방향을 둘러싸고 첨예한 노선 투쟁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더욱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의 구조라는 국제적 맥락까지 얽혀 중국 내부에서는 독자적 발전노선을 정립하기 위한 대립과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따라서 당시 중국의 한일협정을 비롯한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과 국가 발전전략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내부에서 발생한 사상투쟁과 정치 운동의 성격 및 함의를 함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당시 중국 정부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해 여러 차례 공식적인 성명을 발표하여 ‘한일기본조약’은 미국의 음모가 내재된 제국주의의 산물이며, 일종의 미국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의 결과물이고, 최종적으로 중국을 포위하여 공격하려는 전쟁 책략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공표했다. 이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65년 2월 27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명의로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한일회담’과 ‘한일기본조약’ 반대 지지에 관한 성명>에서 잘 드러난다.
(한일기본조약은) 미국 제국주의가 일본 군국주의를 도와 조선반도에 다시 들어오게 하여 ‘동북아 군사동맹’을 연출하고 극동 지역의 긴장을 한층 강화하려는 엄중한 시도이며, 이는 조선 인민과 일본 인민 그리고 아시아 각국 인민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다. (…) ‘한일기본조약’의 서명은 미국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조정하에 진행된 것이다. 수년간 미국 제국주의는 줄곧 일본 통치 집단과 남조선 괴뢰 정권에 ‘한일회담’을 진행하도록 했고, 일본과 남조선을 결합해 ‘동북아 군사연맹’의 조건을 창출했다. (…)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오늘의 아시아는 이미 어제의 아시아가 아니다. 오늘의 일본은 이미 어제의 일본이 아니며, 오늘의 조선은 이미 어제의 조선이 아니다. 조선 인민과 일본 인민은 지금 ‘한일회담’과 ‘한일기본조약’의 반대를 위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 중국 정부와 인민은 조선 인민의 ‘한일회담’ 반대와 ‘한일기본조약’ 철폐의 정의로운 투쟁을 굳건히 지지한다.2)
한일협정을 바라보는 중국 정부의 이러한 인식과 대응에는 당시 미국이 전개한 중국 고립 정책과 실질적 전쟁 위협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즉 1962년과 1963년 미국 정부는 소련 및 대만과 연합하여 중국의 핵실험 계획을 저지하고자 했으며, 1964년 8월 베트남 전쟁을 빌미로 아시아에서 전쟁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중국의 국가안전을 위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은 1964년 <인민일보>와의 간담회에서 미 제국주의를 전 세계 인민의 가장 흉악한 적이며, 주요 투쟁 대상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미 제국주의가 중국의 대만을 강점하고 있고, 조선의 남부와 베트남의 남부를 그들의 식민지로 바꾸었으며,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화평연변(和平演變, 평화적 수단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함)’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획책하고” 있음을 비판한다.3)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정부는 한일협정이 미국의 동북아 군사연맹 구축을 위한 음모이며, 이는 아시아와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기에 각국 인민들이 단결하여 저지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이러한 원칙적 입장과 논리에 입각한 성명이 구체적인 협정반대 투쟁이나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이 직면한 시대적 과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즉 당시 중국은 냉전체제의 진영논리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과 함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폐허가 된 경제의 발전과 민생회복이라는 엄중한 도전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은 대외 경제의 측면에서는 매우 실용적인 입장이었으며,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일본과도 국교 정상화 방침을 수립했다. 예컨대 1955년 12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2기 1차 회의에서 중국은 일본과 정상적인 관계 수립을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제안했으며,4) 실제로 1962년에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마쓰무라 겐조(松村謙三)와의 회담에서 ‘정치 3원칙’과 ‘무역 3원칙’, 그리고 정치와 경제 불가분의 원칙에 따라 점진적으로 양국의 정치경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5) 그리고 1962년 11월 9일 중국의 랴오청즈(廖承志)와 일본의 다카사키 다쓰노스케(高達之助)를 대표로 하여 체결된 ‘중일 장기 종합 무역 비망록’(일명 LT무역)을 통해 양국 간 경제교류가 제도화되었다. 이후 마오쩌둥도 1964년 “일정한 시기에 일본인이 중국에서 공장도 운영하고 광산을 개발하도록 할 수도 있다”고 언급할 정도로 중국과 일본의 무역 관계는 안정화되었으며,6) 1966년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발발하기 전까지 양국의 무역 규모도 꾸준히 증가했다.7)
이처럼 중국 정부는 원칙적으로는 한일협정을 미국의 반공 아시아 전선 구축과 중국 포위 전략으로 인식하고 북한에 동조하여 반대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국가의 재건과 경제발전이라는 실사구시적 논리에 따라 수사적 성명서만 발표했을 뿐 실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중국이 이러한 입장과 전략을 취하게 된 배경은 신중국 성립 이후 국내외적 정세의 변화 속에서 사회주의적 국가건설의 방향을 둘러싸고 전개된 발전노선의 대립과 투쟁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가 스탈린(Joseph Stalin)의 만행을 비판한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식의 독자적 발전노선을 모색하기 시작하며, 당의 지도하에서 이른바 자유로운 학술 의견의 개진과 경쟁을 장려하는 ‘쌍백운동(百花齊放, 百家爭鳴)’을 전개한다.8) 그러나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에 고무되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적 민주’의 문제를 제기하자, 곧이어 이들을 우파로 몰아 타격하는 ‘반우파(反右派)’ 운동을 개시한다. 그리고 반우파 운동을 거쳐 확립된 ‘부단한 혁명’ 방침이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미국 제국주의와 소련 수정주의라는 외부의 적과 국내 및 당내 반동 세력(소위 주자파, ‘走資派’)이라는 내부의 적에 대한 ‘계속혁명’을 주창하는 문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한 달 전인 1965년 5월 21일부터 30일까지 마오쩌둥은 혁명의 성지인 징강산(井冈山)에 올라, “안팎의 협공 속에서, 우리 공산당은 어떻게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보호할 것인가”라고 말하며 문혁의 발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 내부의 사상투쟁과 정치 운동이 1960년대 중미·중소 관계의 변화라는 국제적 맥락과 맞물리면서 마오쩌둥의 중간지대 분석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1970년대 ‘제3세계’ 이론의 초석이 된다. 특히 동아시아 냉전 구도의 차원에서 이러한 변화의 가장 중요한 함의는 국제문제에 대한 마오쩌둥의 관점이 예전처럼 이데올로기적 입장만을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1971년 중국이 국제연합(UN)에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1972년 중미 관계가 완화되었으며, 일본 및 서방 주요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마오쩌둥은 반우파 운동과 문혁 시기에 계급투쟁을 주창하면서도 줄곧 ‘부국강병’을 함께 강조해 왔다는 것이다. 예컨대 1963년에는 “계급투쟁, 생산투쟁, 과학실험은 사회주의 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세 가지 위대한 혁명운동”이라고 역설하며, 심지어는 문혁 후기에도 계급투쟁과 함께 국민경제의 회복은 계속 이어나가야 함을 강조했다.9) 이는 혁명가인 마오쩌둥과 국가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내재적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현실 인식이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원칙적 반대’와 ‘실질적 행동 부재’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후 1970년대 제3세계 이론의 정립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냉전체제의 진영논리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한일협정에 반대하면서도, 부국강병과 경제발전이라는 실용적 목적에 따라 일본 및 서방 국가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온 중국 정부의 이중적 전략이 가능했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 정부의 국내외 문제에 대한 현실 인식과 국가 발전전략 수립의 복잡성과 다면성은 오늘날 새롭게 마주한 미중 관계의 변화와 이에 따른 동아시아 지역 정치의 재편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참조가 될 것이다.
정규식 _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자료
1) 이 글은 『역사비평』 통권 152호(2025년 가을)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인 「한일회담 시기 중국의 대내외 인식과 사상투쟁: ‘57년 체제’의 형성과 ‘문혁’의 서막」을 축약 수정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논문을 참조 바란다.
2) 中華人民共和國外交部, “關於支持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政府反對‘韓日會談’和‘韓日基本條約’的聲明”, 1965年 2月 27日.
3) 첸리췬(錢理群), 연광석 옮김,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 한울아카데미, 2012, 580~581쪽.
4) 萬芋, 「戰後中曰經貿關係回顧與展望」, 『重慶三峽學院學報』, 第1期, 2006, 99쪽.
5) ‘정치 3원칙’은 일본 정부의 반중국 언행 중지, 두 개의 중국 획책 중지, 양국 관계 정상화 방해 금지를 말하며, ‘무역 3원칙’은 정부 간 협정의 체결, 개별 민간 계약 실행, 개별 배려물자 알선을 일컫는다.
6) 첸리췬, 앞의 책, 128쪽.
7) 실제 해당 시기 중일간 무역 규모를 보면, 1960년 2백만 달러에서 1966년 약 6억 달러로 매년 큰 폭으로 증가했다. 양갑용, 「중국의 한일수교 기본인식 연구: 정치 현실과 현상 인식의 부조화 맥락」, 『중국지식네트워크』 8호, 2016, 110~112쪽.
8) 첸리췬, 앞의 책, 146쪽.
9) 첸리췬, 앞의 책, 543~544쪽.
*** 참고문헌
1) 양갑용, 「중국의 한일수교 기본인식 연구: 정치 현실과 현상 인식의 부조화 맥락」, 『중국지식네트워크』 8호, 2016.
2) 정규식, 「한일회담 시기 중국의 대내외 인식과 사상투쟁: ‘57년 체제’의 형성과 ‘문혁’의 서막」, 『역사비평』 통권 152호, 2025.
3) 첸리췬(錢理群), 연광석 옮김,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 한울아카데미, 2012.
4) 萬芋, 「戰後中曰經貿關係回顧與展望」, 『重慶三峽學院學報』 第1期, 2006.
5) 中華人民共和國外交部, “關於支持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政府反對‘韓日會談’和‘韓日基本條約’的聲明”, 1965年 2月 27日.
**** 이 글에서 사용한 자료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1.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70087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