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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2월호
대싱안링의 알선동- 수렵민에서 한족의 세계로 _ 유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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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듯이 여행을 꿈꾼다. 그 중에서도 오랫동안 가고 싶은 곳이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만주 북부의 평원과 넓고 깊게 펼쳐진 산맥이 그랬다. 이곳에 대한 로망은 예컨대 독립군들이 일군에게 쫓겨 중앙아시아쪽까지 밀려난 곳인 탓도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정이 조금 바뀌었다. 이곳의 토착인인 어룬춘족이 샤머니즘을 숭배하고 곰을 토템으로 모시며 순록을 키우며 사는 자신들의 풍속을 오랫동안 지켜왔지만 그것이 점차 무너져가는 양상이라고 전해들은 탓이 컸다. 그 양상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츠쯔넨의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이라는 소설 속에서 어룬춘의 생생한 삶과 더불어 개혁 개방 이후 급격히 유입된 한족으로 인해 쇠퇴해 간 모습을 현장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 희망이 이루어졌다. 2016년 여름의 만주기행에 북만주의 대싱안링(大興安嶺)과 그곳에 위치한 알선동(嘎仙洞)이라는 수렵민 유적이 프로그램 속에 들어 있었다. 알선동은 북위 왕조를 세운 탁발선비족의 고향이었고, 그 역사를 기록한 동굴이 남아 있다는 곳이었다. ‘알선의 뜻도 어룬춘인들의 말로는 수렵민의 신을 뜻하였고, 만주 중북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보족(錫箔族)의 말로는 마을, 고향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수렵민의 고향이라고 부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알선동은 행정상으로는 내몽골자치구 후룬페이얼맹 어룬춘자치기에 속했다. 어룬춘자치기는 내몽골 동북쪽의 거의 끝자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형상으로 보면 대싱안링의 북부와 넌강(嫩江)의 상류가 교차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대싱안링은 내몽골과 만주를 가르는 거대한 산맥으로서 마치 척추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그야말로 북만주의 거의 끝자리라고 불러도 좋을 터였다.

 

사실 당시 만주 답사의 하이라이트는 알선동이라 할 만 했다. 이곳에 오기 위해 하얼빈에 들렀고, 거기서 다시 야간열차를 12시간쯤 타고 헤이룽장성과 내몽골자치구의 경계에 있는 자거다치(加格达奇)를 지나 알선동이 있는 아리하(阿里河) 역에 내렸던 것이다. 대싱안링에서도 한복판의 북부까지 깊이 들어온 셈이다. 역 앞에서 일찍 아침 식사를 끝내고 준비해둔 전세 버스에 올라 알선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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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알선동삼림공원의 모습.

대싱안링의 한복판에 있는 이 공원 부근의 산지는 높거나 험하기보다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닥쳤다. 알선동삼림공원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경비소에서 그곳은 현재 수리중이라서 출입을 할 수가 없다고 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수리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동굴 입구조차 갈 수 없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알선동삼림공원 경비실에 사정을 하였으나 딱지를 맞았다. 다시 인근의 어룬춘민족기념관 위원회의 위원장이 출근하는 걸 기다려 그에게 하소연하였으나, 아리하진 시내에 있는 공원 위원회에 가보라는 권유만을 들을 수 있었다. 오던 길로 차를 몰아 시내의 위원회에 가보니 주임은 공무로 벌써 출타중이서 막막했다. 하지만 일행은 무조건 5층의 판공실로 몰려가서 부주임과 밀고 당기는 회담을 벌인 끝에 경비소를 지나 알선동 입구까지는 갈 수 있다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당시의 긴장했던 마음과 초초함과 고생 따위가 떠올라 좀 장황하게 썼지만, 알선동 담당자들은 한국에서 이 먼 길을 와서 그 유적의 전망조차 못보고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동했던 것 같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삼림공원 경비소를 지나니, 자작나무와 침엽수로 이어진 숲길이 꿈결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어룬춘인들이 높고 높은 싱안링, 망망한 대삼림, 삼림 속에 살고 있는 용감한 어룬춘이라고 노래했던 싱안링은 넓고 깊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의 산맥처럼 높다거나 험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낮은 구릉이 이어지고 종종 풀밭이 나타나는 부드러운 산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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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알선동 주변 풍경. 뒷쪽 절벽 중간쯤에 동굴이 있고, 그 앞으로 숲과 개울이 있다.

 

우리가 보려고 했던 알선동 동굴은 경비초소에서 차로 대략 30여분 정도의 숲길을 달려야 닿을 수 있었다. 비교적 깊은 산중이라 할 만했고, 동굴 앞에는 약간의 평지가 있었고 그 중간에 맑고 시원한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삶의 조건으로 본다면 괜찮은 곳이었다. 알선동은 암벽 중간부에 위치해 있는 자연 동굴이었고, 공사를 위해 가로세로의 비계를 설치한 탓에 접근은커녕 조망조차 좋지 않았다.

 

알선동 유적은 선비족 중에서 후일 북위를 창시한 탁발선비의 원거주지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동굴 속에 북위시대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탁발선비는 대싱안링에서 수렵과 목축으로 생활을 하던 중, 기원후 22-55년 사이에 알선동 일대를 떠나 후룬페이얼 호수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더 남하하여 마침내 386년에 북위를 건국하였다. 그 이후 오늘날의 다둥(大同)으로 도읍을 옮기고 이른바 516국 시대를 통일하면서 화북에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북위는 이른바 호한체제(胡漢體制)를 구축한 대표적인 왕조로서 유목문화와 한족의 농경문화를 절충시켰기 때문에 사실상 유목문화를 제도적으로 한족 사회에 융합시킨 중요한 왕조라고 하겠다. 우리가 잘 아는 애니매이션 영화 뮬란은 바로 이 호한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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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알선동의 내부. 이곳이 북위왕조를 세운 선비족의 고지였다. (중국 인터넷 자료)

 

그 동굴에 북위황제가 명령하여 세운 비석이 있는 것이다. 수리 중이라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 알선동 비석은 북위가 위세를 떨치던 태무제(408-452)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알선동 지역에 사는 오락후국(烏洛候國)에서 사신이 와서, 황제의 선조들이 살던 옛터가 바로 자신들의 거주지라고 말하니, 태무제는 중서시랑 이창(李敞) 등을 보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축문을 이곳에 세웠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이곳에 관료를 보내게 된 까닭, 알선동을 바탕으로 성장한 왕조와 그것이 이룬 위대한 업적, 이것이 가능하게 된 고지(故地)의 음덕과 그에 대한 감사, 그리고 조상에 대한 제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비석은 결국 성공한 알선동 출신이 근본땅을 다시 찾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한족문화를 받아들였으나 유목문화도 여전히 존중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 더 정성을 쏟겠다는 각오를 밝힌 점이라 하겠다. 사실 북위 왕조는 농경과 유목문화의 절충, 나아가 호족과 한족의 연합체제를 통해 강력한 제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자주 북방 민족을 침략의 주체로 인식하였지만,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선비족들의 저 머나먼 알선동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그들을 중국이라는 국가의 틀 안으로 포섭하였으니 그야말로 대마를 안은 셈이다.

 

그러는 사이 이곳의 주인공들이었던 어룬춘인들은 어떻게 변화하였나? 수렵과 유목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그들은 1950년대 이래 중국정부가 꾸준히 추진한 변방의 한족화 정책에 따라 종래의 전통을 대부분 청산하고 농민화되거나 소규모의 읍에 집거하였다이리하로 가는 도중에 마주한 여러 마을은 그 결과였을 것이다. 그 까닭에 그들은 박물관에 사진이나 부조 형태로 남아 있거나, 전통복장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시내를 순회하는 관광거리로 전락하였다. 이제 광활하고 깊은 대싱안링을 떠나 소수민족 중에서도 가장 적은 수효의 소수민족으로 남게 되었다. 1951년에 자치기가 설립될 당시만 해도 총인구 778명 중 4명을 빼고 나머지 774명은 어룬춘인이었다. 4명조차도 수렵민인 어원커와 다우얼족이었다. 59천 평방킬로미터의 땅 모두가 그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1998년에 이르면 이곳의 총인구는 32만여 명으로 증가한 반면 어룬춘인은 약 2,200여 명이었다. 전 인구에서 0.7%정도로 미미한 존재였고, 나머지 99.3%는 한족들의 세계였다. 2천년 이상 지속되어 오던 선비족의 전통과 관행이 사실상 최근의 반세기만에 끝장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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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아리하진 길거리에서 만난 어룬춘인.

전통복장을 입고 말을 탄 채 관광객을 위해 길거리를 순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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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아리하진에 자리한 중국인 마을.

집의 배치나 형태로 보아 현재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조성된 것 같다.

우리가 이곳을 답사할 때 한국에서는 폭염과 폭우가 이어지고 있었다. 허나 이곳은 낮에도 선선했고, 알선동 부근의 개울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왔다. 공기는 달았고, 숲은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여름 한 달 쯤 이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당시 알선동은 8월 중으로 수리를 끝내고 외부에 공개한다고 했으니 지금쯤은 선비족의 고지를 자유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24】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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